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게트 Apr 19. 2020

얼굴

가벼운 마음으로 쓴 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엄마는 이따금 비명에 가까운 앓는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깼다. 엄마의 꿈에서 외할머니는 엄청난 완력으로 엄마를 어딘가에 끌고 가려고 하거나, 시신이 부패하듯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져갔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말을 숨처럼 내뱉던 엄마는 꿈에서 항상 기대와는 다른 외할머니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꿈보다 해몽이란 말이 있고 어느 똑똑한 정신분석학자는 엄마의 상실과 결부해 엄마의 꿈을 성심 성의껏 해석해줄 테지만, 해몽과 정신분석에 능하지 않은 나로선 엄마에게 잔인한  꿈들을 어떻게 위로해줘야 할지 도통   없었다.

위로다운 위로 없이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다. 엄마의 얼굴은 여전히 까칠했고 외할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젖어있었지만, 엄마의 잠자리만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안정되어 갔다. 이듬해 엄마는 처음으로 외할머니 없는 봄을 맞았다.

벚꽃이  야하다.”

나와  산책을 하던 엄마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가로등 빛을 받아 하얀 빛을 뿜어내는 벚꽃을 바라보던 엄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를 곱씹는 기색이 역력했다. “외할머니가 자주 하던 말이거든. 외할머니는 장미보다 벚꽃이 야하다고 했어.” 화려하지 않은 은근함 때문인지, 낮에 수줍게 살랑이다 밤에 빛을 받고 자태를 맘껏 뽐내서인지. 엄마는 구태여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벚꽃에 한참이나 시선을 뒀다.

돌아서 걷는 엄마의 얼굴은 평안했다. 할머니 얼굴이나   보고 싶다던 엄마였지만 엄마에게 구원을   할머니의 얼굴이 아니라, 엄마의 상실감에 아랑곳 않고 눈치 없이  봄꽃이었다. 엄마는 벚꽃 속에서 무엇을 봤을까.  말을 처음 들은 수십   그날 엄마도 외할머니와 봄밤 산책에 나섰던 걸까. 그날의 온도와 냄새, 분위기가 엄마를 휘감았던 걸까. 그렇게 비로소 “벚꽃이 야하다 말하던 외할머니의 얼굴을 피어있는  속에서 보게  걸까. 엄마와 나의  산책에서 피어있던  벚꽃만이 아니었다.

그저 얼굴이나   보고 싶다 말의 정확한 뜻이 “그날의  얼굴을 보고 싶다라는  처음 알았다. 당신과 내가 마주한 공간의 조도와 온도, 나눴던 대화와  안에서 일어난 심적 동요, 그것이 고스란히 드러난 당신의 얼굴. 보고 싶은 것은 맥락 없이 던져진 증명사진 같은 당신의 얼굴이 아니라 나와 함께 공명했던 그날 당신의 얼굴이다. 그렇게 당신은 다시 생동감을 갖고 내게 찾아와 소소한 위안을 주고 이내 떠나가는 추억으로 남는다.

엄마는  이상 외할머니 보고 싶다는 말을  쉬듯 내뱉지 않는다. 엄마의 동선을 따라 집안 가구 곳곳에 외할머니 사진이 끼워진 액자가 놓여있을 뿐이다. 엄마의 대학 졸업식날, 외할머니와 함께 떠난 꽃놀이 여행, 외할머니의 젊은 시절 프로필 사진. 각각의 사진 속에서 할머니는 그날의 동요가 담긴 얼굴로 엄마를 바라본다. 이따금 엄마는 사진  그날을 내게 설명해주며 평안한 미소를 보여준다. 외할머니는 그렇게 엄마에게 다정한 추억으로 남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튜어디스가 오다리이면 안 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