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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게트 Sep 23. 2022

바둑이를 보내며

아무리 생각해도 바둑이는 고양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티비에서도 만화에서도 바둑이는 보통  색깔만 보고 관성적으로 지어낸 강아지 이름이었다.  색깔만 보고 지을 거였으면 차라리 ‘턱시도라고 해야 했지만 바둑이가 태어났을 당시엔 치즈냥, 고등어냥, 턱시도냥 같이  색깔에 따라 고양이를 구분하는 말들이 익숙지 않은 때였다. 작명권을 가졌던 엄마의 뜻이 더해져, 검은색과 흰색 털이 섞인 턱시도 코리안숏헤어는 2011 무렵엔 견주들도   쓰던 조금은 촌스러운 강아지 이름을 갖게 됐다.


바둑이는 줄곧 ‘내’ 고양이였다. 엄마와 아빠가 있어도 유독 내게만 안아달라 성화였다. 문제는 내가 바둑이가 요구하는 정도의 애정을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바둑이는 무릎에 올려주고 안아주는 것으론 만족하지 못했다. 무릎에 올려주면 안아달라고 발톱을 세워 내 팔을 긁었고, 안아주고 나면 입을 맞추자고 내 얼굴에 머리를 부닥치기 일쑤였으며, 한참을 안아줬다 내려놓아도 다시 안아달라고 큰 소리로 울어댔다. 그 소리가 듣기 버거워지면 난 내 방으로 숨어들어갔지만 바둑이는 개의치 않고 내 방문 앞에서 줄기차게 울어대 종국엔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갓 대학에 입학했던 나는 집에서 매일 볼 수 있는 고양이 말고도 재밌는 일이 너무도 많았기에 늦은 귀가로 바둑이의 닦달을 피하기도 했다. 바둑이는 그럴 때조차 내 방 문 앞에 있었다.


다시 말해 바둑이는 외로운 고양이였다. 자기 말고도 4마리의 고양이가 더 있던 집안에서 오롯이 자기만 바라봐주길 바라던 바둑이는, 그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조차 조금은 극성스러웠던 탓에 늘 원하는 만큼의 애정과 스킨십을 받는 데에 실패했다. 어느 순간부터 바둑이는 나를 찾지 않았고, 사람보단 다른 고양이들과 부대끼고 자는 날이 늘어났다. 나는 바둑이가 나와의 관계에서 적당한 거리감을 찾았다고 생각해 안도했지만 내가 틀렸다. 피부염 없이 찾아왔던 바둑이의 탈모증은 온 가족이 매일 번갈아가며 엉덩이를 토닥여주자 나았고 내가 안아줄 땐 여전히 흥분해 발톱으로 긁고 머리로 날 들이받았다. 바둑이의 결핍과 욕구는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나는, 바둑이의 포기에 안도감을 느낀 거였다.


바둑이는 죽던 날 밤 비틀대며 온 거실을 돌아다녔다. 난 그제야 처음으로 바둑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날은 바둑이를 하루 종일 안아주고 싶었지만 내 손길마저 고통일 것 같아 그러지 못했다. 가만히 누워 힘겹게 숨만 내쉬는 바둑이의 이마를 쓰다듬어주는 게 내가 옆에 있다는 걸 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바둑이는 거실 한 구석에 누워 가만히 숨만 내쉬다가 잠시 후 거실 중앙으로, 또 베란다로 자리를 옮겨 누워 한참을 다시 숨만 쉬었다. 한 손으로 바둑이 이마를 만져주고 눈으론 부풀었다 가라앉는 바둑이 배만 바라봤다. 입으론 무슨 말을 해야할까 고민하다가, 고맙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해줬다. 내가 느꼈던 안도감을 사과하는 건 나의 자책이지 바둑이를 위한 명복이 아니니까. 바둑이만큼 나를 일관되고도 강렬하게 좋아해준 존재는 없었으니까. 바둑이는 마지막 숨까지 씩씩하게 내쉰 다음에 눈을 감았고 그제야 맘껏 바둑이를 안아줬다.


바둑이는 우리집에서 행복했을까? 대답은 바둑이만 할 수 있겠지만 이제 바둑이는 없고 내 짐작만 남았다. 의미 없는 짐작 대신 애도를 하자고 마음을 다잡아봤지만 길거리에서 제 주인의 무릎에 앞발을 올리던 강아지를 보고 결국 마음이 무너졌다. 바둑이를 잘 보내주는 방법을 아직 난 모르겠다. 고마운 바둑이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한 무더기의 자책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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