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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리 May 08. 2023

산책하며 발견하며, 실크로드로 기억될 자카르타 나날들

자카르타 SCBD에 거주하면서 도보산책을 자주 하고 있다. 걷다 보면 어느새 아이와 자카르타 배낭여행을 하는 기분마저 든다. 아시타 몰을 통과해 그랜드 럭키와 수디르만 맨션을 지나 육교를 건너면 바로 라뚜 플라자가 나오고 그 뒷문으로 나가면 플라자 스나얀 몰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스나얀 시티 몰까지 갈 수 있다. 빠른 걸음으로 도보 20분 정도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거리다. 돌아올 때는 육교를 건넌 후 세노파티 거리로 한 번에 쭉 걸어올 수 있다. 세노파티 거리 또한 지난해 도보 공사를 마쳐 아이랑 걷기 한결 편해졌다.

 

자카르타 도심 SCBD를 걸으며

 

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걸으면서 눈으로 담는 풍경은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아무리 좋은 고화질의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는다 해도 직접 눈으로 본 풍경과 느낌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아이는 걷다가 잠시 멈춰 서서 꽃잎들을 자세히 바라보거나 땅바닥에 떨어진 열매 씨앗을 발견해 한껏 들뜨기도 한다. 씨앗을 심어 식물이 자랄 모습을 상상하며 쫑알쫑알 신난 아이 모습을 보며 걷는 길이 순간, 여행길처럼 느껴져 1년이 채 남지 않은 이곳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머무는 하루하루를 여행자처럼 많이 느끼자 다짐했다.

 

“너와 함께 걷는 이 길이 실크로드!”

 

1987년에 출판된 일본의 시인, 타와라 마치의 ‘샐러드기념일’ 한 구절에 빗대어 문득 내 머릿속에 떠오른 표현이다. 그리고 연이어 그녀의 단가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뿐사뿐 나란히 걷는 봄길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은 오후


 

아시타몰 근처로 이사 오면서 늦은 오후, 아이 손을 잡고 퍼시픽 플레이스 몰까지 걸어가는 일이 많아졌다. 2년 이상 이 동네에 거주하며 수도 없이 걸어 다녔던 길이지만 매번 다른 하늘빛과 다양한 얼굴의 풍경을 보여준다. 어떤 날은 전혜린의 문장처럼 ‘찬란한 금빛 햇살이 쏟아지는’ 길이 펼쳐진다. 언젠가 무섭게 쏟아지던 비바람에 가차 없이 흔들리던 나무들이 오늘은 따뜻한 햇살을 한가득 품고 있다. 그 힘든 순간들을 가만히 받아낸 나무들에게 아낌없이 쏟아지는 오늘의 이 찬란한 햇살이 나는 그저 기쁘다. 시간은 묵묵히 성실하게 흐른다. 그 햇살 가득 머금고 더욱 싱그러워지길 바란다. 우리도 그렇게 나무처럼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카르타 거주 5년 차에도 여전히 ‘왜 이 좋은 걸 지금 알았지’ 싶은 즐거운 발견들과 만난다. 그전에도 종종 보던 것들인데 시도하지 않거나 그냥 지나치던 것들을 우연한 기회에 접하고 빠지게 된 것이다. 사골곰탕면과 같은 구수한 맛의 하얀색 표지의 인도네시아산 라면 ‘아리랑’과 일본에서 온 ‘잇푸도(IPPUDO)’라는 유명한 라멘집의 시로마루 라멘, 샤브샤브 뷔페 ‘샤부리(SHABURI)’의 단골이 된 지 얼마 안 됐다. 4년만 살고 한국으로 돌아갔다면 미처 모르고 갔을 즐거움인 셈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몇 년간의 체류만으로 내가 보고 아는 것들은 그 나라의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인식조차 어쩌면 자신이 바라보고자 하는 시선 안에 갇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작 몇 년만으로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 것마냥 이곳에서의 생활을 바라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 보는 요즘이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곧 다가온다는 것은 하루하루를 더 소중하게 바라보게 한다. 오늘도 들르는 매장마다 선한 미소를 건네는 직원 분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감사했다. 누군가에게 웃어줄 수 있는 넉넉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인지. 이곳 사람들의 미소가 좋고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봐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돌아보면 감사하지 않을 게 없다.


 

아주 오래전 신문 칼럼에서 인상 깊게 읽은 글이 떠오른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재벌 총수 집의 진정한 주인은 그 집을 온전히 누리고 있는 그 집의 가정부라는 글이었다. 집안일을 하다가 잠시 휴식 시간에 넓은 정원 벤치에 앉아 멋진 경관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그 매일매일의 행복을 맛보며 사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가정부일 것이다. 막중한 업무에 쫓겨 그 멋진 집에서 잠만 자고 나오고 그 환경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니 지금 이곳 이 순간을 진정으로 즐기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면 인도네시아에 머무는 나날들이 마치 실크로드처럼 펼쳐져 인생의 다음 챕터로 이어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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