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리 Aug 01. 2023

언어와 분류에 갇혀 살지 않기를

-시작하기 위해 떠난다(Partir pour partir)-

국제학교에서 다양한 국적의 부모들을 만나다 보면, 엄마 아빠의 국적이 서로 다른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중동에서 왔나 싶은데 영국인이고 아프리카 대륙에서 왔겠거니 싶은데 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사람들이어서, 내 예상이 크게 빗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사실 상대방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구나 금세 깨닫게 된다. 서로 생각이 통하고 마음이 맞으면 친구가 되는 것이지, 거기에 국적과 피부색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얼마 전, 겉모습과 국적에 대한 흥미로운 영상을 봤다. 미국의 한 동네에서 서양 남자가 우연히 마주친 동양 여자에게 국적과 출신을 반복해서 묻는 영상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양 여자는 당연히 미국인이라고 말하지만 그 질문을 던진 서양 남자는 피부색과 얼굴만으로 그 여자를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으로 분류해 놓고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에게 우리는 똑같이 영상 속 서양 남자처럼 묻는다. 우리와 피부색과 생김새가 달라도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한국어가 모국어인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당연히 한국인으로서 인정받으며 한국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길 원한다.

 

내가 아는 것과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인간들이 임의로 정해놓은 범주와 분류들이 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최근에 읽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에서 큰 울림을 준 책이다. 물에서 서식하고 비늘이 있다는 두 가지 사실만으로 인간들이 편의상 어류로 분류한 많은 종이 사실은 어류보다 포유류와 유사하다는 사실이 과학계에서 이미 밝혀졌다. 사실상,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경계가 없고 아무런 기준선도 그어지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이 책은 말한다. 우리가 세상을 더 오래 검토하고 들여다볼수록 인간들이 정해놓은 범주들이 계속해서 무너질 것이라고 말이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 사회 안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도 사회 밖으로 나오면 내부에선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고 아직 모르는 것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세상을 알면 알수록 도통 뭐가 맞는 건지 알 수 없고 더 혼란스러운 것도 원래 세상이 그런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외국에 나와 있으면 한국과는 다른 사회적 인식과 정서를 마주하면서 스스로 믿어왔던 것들도 다시금 생각해 보며, 정반대의 의견을 가진 이들의 말에도 귀 기울이게 된다. 외국 생활은 어떠한 사물을 바라보는 자세에 변화를 주고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주며 무엇보다 '나'라는 하나의 인간과 마주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폭넓은 시야를 갖게 되면서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한국에선 당연하다 여긴 것들이 이곳에서는 당연하지 않음을 알게 되고 반대로 한국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이곳에서 깨닫고 느끼며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 회로가 자연스레 바뀌게 된다.

 

자신의 언어와 분류로 편협한 세계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모국어 수준의 외국어를 연마해 그만큼 더 넓어진 세계 안에서 경계를 만들지 않고 이도 저도 될 수 있는 애매한 세계를 바라보는 일. 내일은 오늘까지의 생각을 언제든 바꿀 수 있고, 시선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유연함을 갖고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아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편견 없이 살아가는 자세. 언제든 어제까지의 생각을 뒤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수필가이자 번역가 전혜린(1934~1965)이 대학 시절, 독일 유학길에 오르며 되뇌던 문장이 다시금 떠오른다. '시작하기 위해 떠난다(partir pour partir)'. 그 말 그대로 그녀는 지평선이 무한대로까지 넓어진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들은 다시 새로운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기 위한 ‘안식년(gap year)’ 같은 기간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옭아매던 틀을 벗어나 새롭게 다시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한국에서 비행기로 7시간을 날아와 지금 여기 있는 것이다.





이 폭풍우는 짜증스럽기만 한 일일까?
어쩌면 그것은
거리를 혼자 차지할 수 있는 기회,
온몸을 빗물에 적셔볼 기회,
다시 시작할 기회일 수도 있다.
늘 거기 있었지만 어째선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놓치고 있었던 것.
그러면 세계는 조금 더 벌어지며 열린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산책하며 발견하며, 실크로드로 기억될 자카르타 나날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