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 님이 쓴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두 번째 이야기를 조금 훑어보았습니다. 박경철 님은 이미 몇 해 전부터 그의 필력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던 분입니다. 원래는 주식과 경제에 능통하여 의사신문에 ‘주식 칼럼’을 기고하던 분인데, 경제 문제를 경제에 국한하지 않고 중국의 고전과 고사들을 끌어다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에서 그의 인문학적 재능과 박식함을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서가에서 그가 쓴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책을 발견하고 한 번 사서 읽어보아야지 하며 지내다가 1편은 놔두고 2편을 먼저 구입하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까?”라는 그의 물음과 1편에서보다 2편이 ’ 자신‘의 입장에서 진솔하게 기록한 글이라는 머리말에 이끌린 탓입니다.
“삶을 열정과 사랑으로만 헤쳐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문득 우리가 청춘이 아닌 기성세대로 편입되었음을 깨달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현실이라는 거대한 틀에 갇혀 자유로운 운신을 제한받고 있습니다. 이미 기성세대로 편입된 까닭입니다.
요즘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내용이 자못 냉소적입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고결한 사랑 어쩌고 떠들어봐야 다 종족번식이라는 동물적 본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거라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즉, 아무리 플라토닉을 외쳐도 그 기저엔 반드시 에로스의 유혹과 영향이 깔려있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이유로 여자는 튼튼한 남자를 찾고, 남자는 지혜로운 여자를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절절한 사랑도 결국 만날 수 없고 눈에서 멀어지면 에로스적 욕망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마음도 멀어지게 마련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진정 고결한 플라토닉 러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2005 12.2 산비
드디어 <월든>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의 군주이며...” 영국의 시인 ‘윌리엄 카우퍼’의 시 구절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라보는 것은 내가 그것을 인지하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입니까? 각자가 바라보는 세상이 어떠할 것인지는 각자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세상은 내가 인식하는 만큼만 나의 것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그것들만 나에게 의미가 있으며, 그것들에 한해서는 누구도 나에게 무어라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바라보는 것들의 주인이 되는 것이며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권리입니다.
책 여기저기 언급된 베다의 경전이나, 중국 탕왕의 우화, 공자의 말을 보면서 소로우가 도를 깨치기 위해 얼마나 다방면으로 많은 공부를 하였는지 짐작이 되었습니다. 소로우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배울 수 있는지 실천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답니다. 그래서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탄식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네요. 자기의 인생을 자기의 의도대로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요?
그는 아침 깨어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부드러운 음악을 들으면서 향기가 가득한 가운데 새롭게 얻은 힘과 우리 내부의 열망에 의해 깨워질 때만 전날보다 더 고귀한 삶이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못한 날은 하루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별로 기대할 것이 없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태양과 보조를 맞추어 탄력 있고 힘찬 생각을 유지하는 사람에게 하루는 언제까지나 아침이다.’라고 말해줍니다.
내부의 열망에 의해서 잠에서 깨어나고, 하루 종일 힘찬 생각을 유지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깨어있다는 것은 살아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신적으로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하루 종일 졸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독서와 사유만이 우리를 깨어있게 해줄 것입니다. 졸지 마시고 열심히 독서하세요. 그럼.
2005 12.6 산비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읽기를 마쳤습니다. 진솔한 자기 고백이라기보다는 타고난 이야기꾼의 입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을 특별한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저자 자신도 그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다만 그것들을 기록하지 않았거나 무심코 차창으로 흘려보냈거나 무릎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른 사람들이 그냥 무심코 흘려버리는 이야기들을 귀담아듣고 기록해두었다가 그것에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재구성합니다. 전해 들은 이야기도 마치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고 직접 보았던 것처럼 써놓고 있습니다. 독자들을 직접 글의 현장에 있다고 착각하게 할 정도로 글이 생생하고 긴박하고 재미가 있습니다.
지난번 김별아 님의 책을 읽으면서도 작가의 상상력이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마치 자신이 정순왕후가 된 듯한 기분으로 글을 썼을 것입니다. 눈앞에 그려진 광경을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그려내고, 주인공들의 마음을 세밀히 짐작하여 묘사하였을 것입니다. 그 생생한 현장감이 글을 읽는 이로 하여금 이야기 속으로 푹 빠져들게 만들었겠지요.
저도 좀 더 노력하여 그런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제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풍부하고 정밀한 상상력으로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생생하게 글을 써낸다면 독자들도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깊이 공감하지 않을까요? 그런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2005 12.07 산비
오늘 하루는 어떠셨나요? 책은 많이 읽으셨나요? 저는 <월든>의 ‘독서’ 장을 읽고 처음으로 돌아가 ‘숲 생활의 경제학’ 편을 읽고 있습니다.
소로우는 고전 읽기의 중요성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쓸데없는 가십거리나 아동도서 같은 수준 낮은 책들을 읽으며, 또는 주인공이 이랬네 저랬네 하는 연애소설 같은 걸 읽으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신문도 별 볼일 없는 일들을 떠벌리는 하찮은 존재로 간주합니다. 서양의 고전, 동양의 고전, 각 종교의 경전들을 읽고 사유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읽을 것들을 좀 가려서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지금까지는 잡학적인 읽기를 해왔습니다. 신문은 매일 배달되는 조간과 경제 신문 이렇게 두 부를 아주 꼼꼼히 읽는 편이며, 보다가 모르는 용어나 개념은 따로 인터넷을 뒤져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러 학회에서 발행하는 각종 학술지들을 읽어봅니다. 월간 조선이나 우먼 센스 같은 월간지들도 대강이라도 훑어보고 있습니다. 화장실에는 ‘샘터’ 같은 생활 잡지를 비치하여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오후에는 읽고 싶은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집에 가서는 철학서들이나 잠언 집을 읽다가 잠자리에 듭니다.
마치 문자 중독증에 걸린 사람처럼 글들을 읽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부족합니다. 강박적으로 다 읽으려 하지 말고 포기할 것들은 과감히 포기하고, 계획을 세워서 꼭 읽을 것들만 선택적으로 읽어야 할까 봅니다. 어둠이 내려앉습니다. 안식의 시간입니다. 밤이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이 좋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2005 12.07 밤의 언저리에서 산비
오늘은 <월든>을 잠시 접고 헬렌 켈러의 책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읽었습니다. 어릴 적에 헬렌 켈러의 자서전을 읽고 굉장히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책을 읽으며 그 감동이 재현됩니다. 그녀의 유려한 필체 속에 정상인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진한 감성과 사유가 배어있습니다.
“무릇 구원은 가치관의 전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무릇 가진 것을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병에 걸린 다음에야 건강의 중요함을 깨닫는 법입니다.”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도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감지하지 못하는 정상인들을 질타합니다.
“어둠도 그 한 점 기억마저 앗아갈 순 없었다. 단 한 번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보았던 그날은 우리 것이다. 그날이 보여준 것들 모두와 함께.”
헬렌은 생후 19개월 만에 열병을 앓고서 보고, 듣는 기능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보았던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을 서서히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 어린 날 눈에 각인된 푸른 벌판과 빛나는 하늘에 대한 기억만은 자신 안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았던 그것들을 얼마나 우리의 가슴에 각인하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가물가물 흐릿한 의식 저편으로부터 서서히 생각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돌아오는 떨림이 감지됐다. 언어의 신비가 그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헬렌이 처음으로 이 세상 모든 것들에게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으면 “나는 처음으로 다가올 새날을 소망했다.”라고 고백합니다.
“선생님, 사랑은 이런 건가요?”
“그래 맞아. 사랑은 햇살이 비추기 전 끼어 있던 구름 같은 거란다.”
“헬렌.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구름을 만질 수는 없단다. 그러나 비를 만질 수는 있지. 한낮의 무더위에 시달려 목마른 대지와 꽃들이 이 단비를 받아 마시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도 잘 알잖니? 사랑도 꼭 그렇단다.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모든 것 위해 부어지는 그 달콤함만은 느낄 수 있지. 사랑이 없다면 행복하지도 뭘 하고 싶지도 않을 거야.”
헬렌이 처음으로 ‘생각하다’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인식하게 되고 나서 모호했던 ‘사랑’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는 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구름처럼 만질 수 없지만 비라는 실체가 되어 우리에게 스며듭니다. 사랑에 목마른 사람에게 비는 한줄기 생명수와 같습니다. 메말랐던 황무지에 비가 내리면 대지는 쾌활한 생명력을 얻습니다. 곧 싹이 움터 이파리가 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도 그와 같습니다.
2005 12.9 산비
오늘은 조금 한가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덕분에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헬렌 켈러의 <Three Days To See>를 완독 하였고 이어서 무량 스님의 수행기 <왜 사는가>를 절반 이상 읽었습니다. 지난번 박경철 님의 책도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책들은 쉽게 읽혀서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1권과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권에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구도의 길로 들어서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앞일에 전혀 괘념치 않고 그냥 별생각 없이 좋아서 하는 일을 오직 할 뿐이다.”
무량은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들로 괴로워하던 중, 숭산 스님을 만나 ‘오직 할 뿐’이라는 법문을 듣고서 크게 깨달음을 얻습니다. <만행 -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쓴 현각 스님도 숭산 스님의 인도로 구도자의 길에 들어섰다고 하지요. 숭산 스님의 도량이 정말로 큰 가 봅니다. 큰 스승 밑에서 큰 제자가 나옵니다. 제대로 된 큰 스승을 만나야 큰 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인연이고 다 자기 타고난 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면서 징징거리기만 합니다. “나도 저렇게 한번 해보고 싶은데... 나도 산에 한번 가고 싶고, 나도 낚시하고 캠핑하며 살고 싶은데...” 하지만 사람들은 결코 도시를 떠나지 못한 채 등산, 낚시용품점의 쇼 윈도만 기웃거립니다. 미래를 잡고 싶다면 미래를 쫒아 가야 합니다. 흥미진진한 삶을 살고 싶다면 약간은 무모할 정도의 도전 정신과 모험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2005 12.13 산비
서로의 생각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어 기쁜 마음입니다. 점점 더 독서의 재미를 느껴 가신다함도 반가운 말씀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책을 읽으며 깨달아가는 인생의 진리들이 법열을 가져다줍니다. 전에는 책을 봐도 이렇게 재미있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책을 조금이라도 더 읽고 싶어 안달입니다. 버려지는 시간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습니다.
읽고 싶은 책들이 한 보따리입니다. 읽은 책들과 읽을 책들을 서가에 쭉 꽂아놓고 보고 있으면 마음이 부자가 됩니다. 책을 한 권 읽기 시작하면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어떤 책을 읽다가 거기에 소개된 또 다른 책이 읽고 싶어 지고, 그것은 또 다른 신세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별이 빛나는 것이 아니고, 실은 내 눈빛이 그 별을 빛나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내 감각이 삽상한 가을과 겨울을 만들어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자기 이름을 의미 있게 만들어서, 그 이름에 주어진 값만큼 우주를 누리고 삶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 눈빛을 맑게 하고, 내 감각을 민감하고 풍성하게 하고, 내 이름을 값어치 있게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조선의 거상 임상옥이 스승에게 배움을 마치고 하산할 때 그의 스승은 위기가 닥치면 풀어보라는 주머니 세 개를 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네가 첫 번째 위기는 위기임을 알겠으나 두 번째 위기는 위기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위기를 위기로서 직감할 때에는 헤어날 방법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위기를 위기로서 인식하지 못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멸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심하여라.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릴 때가 혹시 무서운, 위험한 고비가 아닐까 생각하여라.”
위기의 본질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일이 너무 잘 풀린다고 자만하거나 자족하지 말고 항상 경계의 마음자세를 가지고 살아갈 일입니다. 정말 문제는 어떤 문제가 있는 데 우리가 그것을 문제로서 인식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늘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스스로에게 물어서 과연 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2005 12.16 산비
어떤 사람에게는 편리한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불편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안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비가 오는 것이 좋은 사람도 있고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일이 무릇 이와 같습니다.
오늘 아침엔 ‘명심보감’을 읽으면서 왔습니다. 황희 정승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는데 참 재미있습니다. 아시는 이야기일 겁니다. 예전에 황희 정승이 젊었을 때, 혈기 왕성하고 기고만장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길을 가는데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습니다. 거기 누렁이 황소와 검은 소가 같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황희가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소가 더 일을 잘 하는가?” 그러자 농부가 그냥 거기 서서 대답을 하여도 되는 데 굳이 가까이에 달려와서 귀엣말로 속삭입니다. “황소가 더 일을 잘하지요”
의아한 황희가 묻습니다. “무에 그깟 일로 이렇게까지 하는가?” 그러자 농부가 대답합니다. “같이 일을 하고 있는 데 한쪽 편만 들면 다른 소는 기분이 좋지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 후로 황희는 깨달은 바가 있어 평생을 남의 단점이라곤 입 밖에 내지 않고 살았으며, 많은 업적을 남긴 훌륭한 정승이 되었다고 합니다. 남의 허물을 귀로는 들을지언정 입으로 말하는 것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열반경에 나오는 공덕천(功德天)과 흑암천(黑暗天)의 이야기는 들어보셨나요? '공덕천'은 언니이고 '흑암천'은 동생입니다. 언니는 세상이 부러워하는 절세미인이고, 동생은 만인이 꺼려하는 못난이 얼굴이었습니다. 이 두 자매가 좀 특이한 것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림자처럼 늘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부잣집에서 언니를 초청했는데 문 앞에서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집주인이 동생은 초청하지 않았다면서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니는 혼자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면서 동생의 손을 절대 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이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언니는 행복을 뜻하고 동생은 불행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바랄 뿐 그 누구도 불행이 다가오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불행의 그림자는 피하고 멀리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공덕천'과 '흑암천' 자매처럼 우리네 인생에서도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짝이 되어 같이 오고야 맙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즈음 좋은 일들만 계속 있어서 조금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好事多魔이고 塞翁之馬이지요. 세상일이라는 게 늘 그렇습니다. 너무 호들갑스럽게 좋아할 일도 아니고 세상이 다 무너진 듯 슬퍼할 일도 아닙니다. 세상만사 길흉화복 모든 일이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마음먹기에 달려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정리하며 차분하게 살아갑시다.
2005 12.20 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