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고도원의 아침편지에서는 ‘스테판 M 폴락’의 책 <2막>에 나오는 문구를 인용하였더군요. 그 책을 사두고 서문만 읽은 채 방치하고 있었는데 어서 읽어 보아야겠습니다. <월든>도 읽어야 하고, <아직도 가야 할 길>도 마저 읽어야 합니다. 부지런히 읽는 수밖에요.
“검게 그을린 얼굴에 부르튼 발을 보고 학연은 아버지 제자의 손을 붙들고 감격해 울었다. 그의 손에는 그 옛날 스승이 주었던 부채가 들려 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시울이 뭉클해졌습니다. 자신의 못남을 탓하던 제자에게 오로지 부지런하면 된다던 스승의 따스한 가르침. 그 가르침을 평생 마음에 품고 학문에 정진했던 제자. 61년이 지난 다음 스승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회상. 스승의 스쳐 지나가는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몸서리쳐집니다.
<미쳐야 미친다> 중 2장 ‘멋진 만남’ 편부터 먼저 읽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책을 읽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읽으려니 끝이 멀어 보였는데, 중간부터 읽어나가니 독서에 속도가 더 붙습니다. 프로네 님도 다음에 한번 써먹어 보십시오.
2005 11.18 산비
토요일 날 서점에서 두 권의 책을 구입하였습니다. 한 권은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 두 번째 이야기이고, 또 한 권은 김별아의 장편 소설 < 영영 이별 영이별 >이라는 책입니다. 홍대 앞에 있는 ‘산울림’ 소극장에서 윤석화의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이 소설이 무대에 올려진다고 합니다.
정순왕후는 열다섯의 나이에 한 살 어린 단종과 정략 혼사로 왕비가 됩니다. 1년 6개월 뒤,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을 가게 되지요. 귀양 간 단종이 다섯 달 만에 사사당하자 정순왕후는 서인에서 걸인, 날품팔이꾼, 뒷방 늙은이가 되어 여든둘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가혹한 운명을 살다 갑니다.
“나는 우는 듯 웃으며 죽었습니다.”라는 대사로 시작하는 이 연극에서 윤석화는 82세의 할머니부터 15세의 꽃다운 신부까지 60여 년의 세월을 소화해 낸다고 합니다.
소설 <영영 이별 영이별>을 읽다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사랑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어떻게 사랑하면서 강샘하지 않을 수 있으리까? 나는 상상만으로도 눈에서 불이 돋고 혀끝이 타들더이다. 정숙과 덕행을 빌미 삼아 사랑을 속이고 모욕할 바에야, 그저 마음껏 사랑하고 실컷 부대끼며 투기하는 천방지축 뻘때추니가 차라리 낫지 않나 싶었습니다.”
왕이 후궁과 노니는 것에 대하여 단종이 만약 그랬더라면 하는 가정을 상상하여 정순왕후가 말하는 대목입니다. 차라리 솔직한 인간적인 고백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설을 다 읽고 연극을 관람하면서 그 느낌을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듯합니다.
2005 11.21 산비
어제 저녁엔 <영영 이별 영이별>을 마저 읽느라 편지도 못 쓰고 집에 갔습니다.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어 그대로 끝가지 읽고 퇴근하였습니다.
삶이란 문틈 사이로 말이 번쩍 하고 지나가는 것과 같은 찰나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파란만장하고 기구하기 짝이 없는 지난한 삶을 이어갔다 해도 결국은 찰나 같은 순간에 불과합니다. 헤어날 수 없을 것 같던 고통스러운 시간도 그또한 지나가기 마련이고 어쨌거나 삶은 살아집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렇게 잔혹할 수 있는 것인지, 신이 과연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는지를 의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무서운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또한 세상을 살맛 나게 하고 그 아픔을 보듬어 주는 것도 결국 사람입니다.
어제 ‘편견’과 ‘줏대’에 대한 토론은 참 재미있었습니다. 무엇을 토론할 때 비교의 대상을 선정하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가 수월합니다. 두 가지 개념의 비슷한 점과 차이점을 나열하다 보면 본질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지요. 어제 프로네 님이 강조하신 ‘닫힌 마음과 열린 마음’은 제가 생각하기엔 초점이 좀 어긋나 있지 않나 싶습니다. ‘편견’ 보다는 ‘고집’ 쪽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고집’과 ‘줏대’는 또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을까요. 비슷하기도 하고 약간 차이가 나는 개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릅니다. ‘오만’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자존심’과 ‘줏대’는요? ‘자신감’과의 비교는 어떤가요? 이런 이야기들을 결론이 날 때까지 끝장토론을 벌여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책 열심히 읽으시고요. 그럼.
2005 11.23 산비
정민 선생의 책 <미쳐야 미친다>를 읽고 있습니다. 유춘오(留春塢) ‘봄이 머무는 언덕’ 홍대용의 집 이름입니다. 정말 멋진 이름입니다.
“따로 들으면 맑은 것은 맑고, 그윽한 것은 그윽할 뿐이다. 하지만 합주를 하면 맑은 것은 깊어지고, 그윽한 것은 시원스럽게 된다. 깊으면 아득하고, 시원스러우면 화합한다.”
합주의 의미를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합창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프라노와 알토, 테너와 베이스가 만나, 서로 받쳐주고 밀어 올리면서 끌어줄 때 그윽하고 시원하며 애달픈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한 가지에만 마음을 쏟으면 얽매이게 되어 즐거움 또한 크지가 않다. 뜻에 얽매임이 없으면 즐거움은 한없이 커진다.”
음악에 관련된 말이지만 우리 인생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몰입하되 얽매임이 없어야 합니다. 꿈을 꾸되 꿈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과 즐거움을 한가로이 음미할 수 있게 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습관처럼 메일함을 열어보고, 문자를 날린다. 그런데도 속은 차지 않고 허전하기만 하다. 사람과의 만남은 겉돌기만 하고, 저마다 꿍꿍이속을 내보이지 않아 좀체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저자가 박지원의 짧은 편지를 소개하기 전에 서두에 내뱉은 말인데, 그 말이 정곡을 찌르고 있어 폐부가 아려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2005 11.23 산비
우리는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하거나 큰 병을 얻게 되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억울해합니다. 살다가 갑자기 험난한 일이 닥쳤을 때 ‘왜 하필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하는 생각에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왜 내게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기에 우리의 지혜는 너무 짧고 보잘것없습니다.
때로는 나 자신의 욕망의 정체조차 불확실하고, 그 욕망이 어떤 연유에서 기인한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떨쳐내야 하는지도 잘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든 그것을 인생의 종착점까지 지고 가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미쳐야 미친다>를 미친 듯이 읽고 있습니다. “사물의 본질을 투시하는 맑고 깊은 눈, 평범한 곳에서 비범한 일깨움을 이끌어내는 통찰력.” 홍길주의 <수여 방필>이라는 글을 보고 저자가 칭송하는 말입니다. 저도 그런 눈과 통찰력을 갖추고 싶습니다.
2005 11.24 산비
아침에 출근하면서 프로네 님이 주신 논문 한편을 읽었습니다. <영원 회귀하는 것으로서의 세계> 논리 정연하게 전개된 글을 읽고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주의 근원, 궁극적 원인에 대해서 인류는 끊임없는 사색과 탐구를 해오던 끝에 이 우주와 자연의 현상계에 어떤 법칙이 있음을 알아냅니다. 이 법칙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먼저 읽었던 한동석 님의 <우주 변화의 원리>에서 아주 상세히 공부한 바 있지요. 물론 그 법칙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아! 이 우주에 어떤 법칙이라는 게 존재하는구나’ 하는 정도의 배움은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법칙이 존재하기 위해서, 그 법칙의 공식에 따라 위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 보니 결론적으로 어떤 절대적인 힘, 근거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이데아’라고도 부르고 ‘제1원인’, ‘브라흐만‘, 또는 '태극' 이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다만 아직도 이 본체의 힘, 생명의 힘의 근거가 가지는 영원성 그 자체는 설명할 수 없고, 단지 그 힘이 있다는 것만을 현자들이 알아낸 것이지요.
이 절대적 힘에 의해서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매우 정확한 유형을 가지고 끝없이 순환하고 되풀이된다는 것이고, 그래서 현재에 충실해야 함을 역설하는데... 글쎄요. 여기서부터 제 생각은 달라집니다. 논리적 모순점이 발생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어차피 과거의 되풀이라면 우리는 의지적으로 현재에 충실할 필요가 없어져 버립니다. 어차피 현재 되는 일들이 우리의 자유 의지가 그 어떤 영향을 줄 수 없는 바에는, 우리는 아주 무기력한 존재가 돼버리는 것이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정론>도 비슷한 이유로 저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신이 이미 우리의 갈 길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거든요.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처도 결국 신이 잡고 있는 끈을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가 과거의 반영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 그것은 곧 과거의 반복이고, 우리가 아무리 벗어나 보려 해도 결국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를 뒤집어쓴 꼴이 돼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이 논문을 쓴 사람도 사실 그것을 묻고 있습니다. 이 우주에서 발견한 법칙을 그 법칙을 발견한 인간에게도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지를 묻습니다. 한동석 님은 거꾸로 말하였지요. 오히려 소우주인 인간을 연구해서 인간 내부적인 법칙성을 발견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대우주의 법칙성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라도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저의 생각은 인간은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생물체라는 특성만 놓고 보면 모든 법칙에 대한 설명들의 보편성을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에게는 자유의지, 혼, 백, 영이 있어 이 우주의 보편적 법칙을 적용할 수 없는 예외를 만들어 냅니다.
사기 열전에 나오는 <백이숙제 전>에서도 ‘사마의’ 가 말하기를 ‘과연 하늘은 있는가?’를 묻고 있지 않습니까? 하늘, 신 또는 근원적 힘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렇게도 극악무도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논지에서 약간 벗어난 감은 있지만 아무튼 제가 보는 인간은 아주 특이한 별종입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이 보편적인 우주에서 굉장히 독립적이고, 주체적이고.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물론 거대한 힘을 가진 우주의 변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그리고 결국 죽고 나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적어도 살아 생존하는 동안은 자기의 길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유일한 무엇입니다. 그런 관념을 가져야 내가 살아있음이 의미가 있고, 생을 살아가는 의미가 있으며, 현재에 충실하고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저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프로네 님의 생각과 반론을 부탁드립니다.
2005 11.26 산비
어제는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모티프로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스케일이 크거나 박진감 넘치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우리에게 사랑은 무엇이고, 삶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의미 있는 영화였습니다. 이렇게 영화를 보고 나서 나 자신과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가 저는 좋습니다.
잔잔한 일상의 기쁨들이 모여서 삶이 되고 행복이 됩니다. 바로 이 순간이 ‘영원회귀’ 된다고 할 때, 거기에서 우리가 지금 현재에 충실해야 하는 당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원하기를 바랐던 이 순간도 언젠가는 지나가버리고 우리는 결국 죽음이라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종말이 있어서 두렵고 슬픈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디오니소스적인 긍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두려움과 슬픔을 극복하고 생의 마지막을 행복하고 황홀하게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포함한 삶에 대한 전면적 긍정, 비극과 파멸을 포함한 삶에 대한 이중의 환희, 파멸의 긍정,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무한한 긍정. 즉, 존재하는 모든 것에 나름의 생성 이유와 필연성을 부여하는, 그래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모두 받아들이는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성스러운 긍정이자 최고의 긍정 형식이고, 그것이 바로 니체 철학의 요체인 ‘디오니소스적 긍정’입니다.
우리가 흔히 니체를 허무주의자, 염세주의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그가 기독교를 비판하고 ‘내세는 없다’라고 주장한 데 기인하지 않나 싶습니다. 신은 죽었고 하늘은 비어 있으며 그래서 인간은 죽고 나면 끝이라는 그의 인식.
“기꺼이 죽어 주면 되지 않는가. 저 하늘이 텅 비어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거기서 기존 질서를 해체하려는 허무주의적 색채만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니체를 니힐리스트로 몰아붙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니체는 인간을 무한히 불쌍하게 생각하고 측은하게 바라보았으며, 약한 인간들을 구원해내고자 처절하게 노력했던 철학자이자 예지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제가 며칠간 니체를 공부하면서 주목했던 점은, 진리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주체로서의 자의식 즉, 현재를 인식하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실존적인 존재자로서의 ‘나’입니다.
우주 현상계 속의 ‘나’, 대자연의 인과 법칙 속에 속해있는 ‘나’는 그냥 생물학적인 인간일 뿐입니다. 대자연의 순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 ‘생로병사’의 길을 따르는 몸으로서의 인간입니다. 그것과는 별도로 사유하는 인간으로서의 ‘나’가 인식하고 펼치는 정신계 속의 ‘나’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나’입니다.
그것은 ‘나’가 존재해야만 의미가 있고 따라서 존재하게 되는 세계입니다. ‘나’가 없어지면 같이 없어져 버립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무한히 영원 회귀하고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각각 실존하는 ‘나’들 속에 또한 영원히 존속하게 될 것입니다.
니체에 의하면, 세계는 근원적인 고통으로부터 잉태된 그럼에도 모든 존재자 내에 언제나 현재적으로 머물러 있는 생 그 자체이며, 이 현재적 생이 ‘영원회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니체를 통해 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종교와 신에 대한 문제가 한동안 저를 괴롭혔는데 니체 쪽으로 좀 더 기울어지는 느낌입니다. 니체의 사상을 배경으로 존재의 문제에 대한 제 나름의 통찰을 몇 자 적어보았지만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궤변에 가까운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곰곰이 읽어보시고 발견되는 생각의 오류들을 지적해주시면 기쁜 마음으로 다시 검토해보겠습니다. 그럼.
2005 11.28 니체에 도취된 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