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pe Diem’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자주 했던 말입니다. ‘카르페 디엠’ ‘삶을 즐겨라’라는 뜻의 라틴어죠. 어떻게 해야 삶을 즐길 수 있을까요? 즐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일까요? 삶이 어떠해야 즐거울 수 있을까요?
재미가 있어야 한다! 재미만 있으면 즐겁나요? 아닙니다,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성취와 보람이 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주도적 행위여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삶을 즐기는 행위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삶은 스스로 주관하는 것이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자유’가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인지 그 범주를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김별아 씨의 <미실>에서는 보다 개방적인 ‘자유’를 추구하고 논의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성의 문제, 성에 대한 자유의 허용범위에 다다릅니다. 오죽했으면 쇼펜하우어 같은 대철학자도 아예 노골적으로 인간을 성욕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는 동물로 간주했을까요?
우리는 가족의 일원으로, 조직 사회의 일원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 많은 의무와 책임을 요구받습니다. 그것이 동양의 관계론적 사고에 근거한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이러한 사회적 규약들을 내 맘대로 벗어던질 수 있을까요? 그러면 자유로운 것인가요? 반대로 규약에 매여서 나의 본질과 내면의 울림을 억누른다면 그러고도 우리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 밤 깊이 한번 성찰해보시기 바랍니다.
2005 12.22 산비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짧은 순간에도 우리는 사실 많은 생각들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판단을 내리는 그 순간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직관’ 과는 조금 다른 ‘무의식적 사고’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테니스를 배울 때 처음엔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쳐보지만, 훈련을 거듭하면 나중엔 생각하지 않고도 잘 칠 수 있는 것처럼, 무의식적인 사고도 훈련을 하면 나아진다고 합니다. 평소에 마음을 수행하고, 좋은 양서를 읽으며 생각을 닦아 놓으면 어떤 위기 상황에서 순간적인 판단을 내릴 때에도 도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의 지도>를 계속 읽고 있습니다. 동서양인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실험적인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는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여러 예로 볼 때 그러한 차이는 선천적인 유전자의 차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해 있는 사회와 문화의 차이로 인해 습관처럼 자연스레 몸과 머리에 배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교육입니다. 어려서부터 어떤 교육을 받고 자라났는지가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초등 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학법에 저렇게 목을 매는 것도 그것이 비단 사학재단의 비리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 교육의 정체성에까지 문제가 닿아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2005 12.23 산비
안셀름 그륀의 <행복한 선물>을 읽으면서 출근하였습니다.
“당신 자신의 고유한 삶의 길을 따르라.... 나의 고유한 삶의 자취는 나를 일상의 나날들에서 생기 있는 사랑의 세계로 인도하고, 현존하고 있다는 기쁨으로 인도하며, 나의 삶을 멋진 축제가 되도록 인도한다.”
내면의 평화는 우리가 온 세상을 정복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음을 역설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어떤 빛을 발하면 그 에너지가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행복과 이상은 결국 자신의 고유한 삶에 있음을, 오늘 이곳에 있음을, 바로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의 고유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고유한 삶이 있기는 한가요? 우선은 내가 구축한 나만의 고유한 삶의 세계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고유하고 개성 있는 삶이면 다 되는 것일까요? 만약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 해도 그저 그 고유한 삶의 길을 따라가면 되는 것일까요? 그러한 삶을 과연 올바르고 아름다운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국 자기 수련이 필요합니다. 마음공부가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훈련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직 미완성체입니다. 그저 나아갈 뿐입니다.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어떤 규칙을 정해 그것을 스스로 지켜나가고, 내가 참으로 자유로움을 느끼는 어떤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2005 12.24 산비
“나를 잊어버릴 때에만 나는 참으로 그곳에 있게 된다. 나 자신과 외부로 드러나는 나의 행위에 대해 지속적으로 생각하기를 그만둘 때, 비로소 나는 만남을 가질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으며, 우리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을 즐길 수 있다.” - 안셀름 그륀
無念無想, 沒我의 경지가 필요합니다. 나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본디의 참이 살아납니다. 그러나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고뇌하고,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가 없습니다.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휴가를 가서도 자신이 휴가를 잘 보내고 있는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고,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그곳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느라 그곳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즐기지 못합니다.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여기는가에 대해 생각하느라 그 사람과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됩니다. 이들은 기도할 때에도 그 기도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에만 집착합니다.
‘안셀름 그륀’은 은총들 중에서 가장 큰 은총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일은 바로 현재 있는 것에 자신을 온전히 몰두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해줍니다.
얼마 전에 소록도에서 40년 넘게 환자들을 돌보시던 오스트리아 수녀님 두 분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났습니다.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머나먼 이국땅에 날아와 썩어 문드러진 한센병 환자들을 일일이 어루만지고 돌보다가, 이제 나이가 들어 오히려 주위에 폐를 끼칠까 봐 한국에 왔던 그대로의 짐 가방 하나만 가진 채 본국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잊지 않고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무량 스님이 이야기하는 ‘오직 할 뿐’이라는 화두도 결국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됩니다. 실리를 좀 더 챙기려고 너무 버둥대지 말고 이기심을 버리고 오직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몰두하면 우리는 거기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읽을 뿐, 오직 달릴 뿐, 오직 걸을 뿐입니다. 도를 닦고, 선 수행을 하고, 명상을 하는 일들이 다 몰아의 경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가바드 기타>를 읽기 시작하셨다니 저도 시작해보렵니다. 1월 한 달간은 다른 책들은 밀어 두고 우선 <바가바드 기타>에 전념해보겠습니다. 지난번 <우주 변화의 원리>처럼 책을 읽어나가며 느낀 점과 각자 가진 의견을 교환해봅시다. 지쳐있는 와중에도 오랜만에 프로네 님이 보내오신 편지를 읽으며 힘을 얻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그럼.
2006 1.2 산비
“자신을 극복하고 삶의 시련을 이겨내는 것이 히말라야를 정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 오늘도 나를 찾기 위해 조용히 인생이라는 이름의 산을 오른다. / 위험을 무릅쓰고 미지의 세계를 찾아 살피는 일은 나를 알고 내가 사는 이 세상을 보다 더 깊이 있게 접근하기 위한 공부와 수련의 한 과정이다.”
산악인 박영석이 쓴 <끝없는 도전>을 읽고 있습니다. 도전, 모험, 개척, 탐험... 박영석이 펼치는 산과 사나이들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여 나도 모르게 책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도전하는 박영석의 글을 읽으며 주먹이 꼭 쥐어지고 힘이 불끈 솟는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어차피 한번 죽는 인생이고, 신이 이미 각자마다 정해 놓은 수명입니다.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이 짧은 생애를 살아가며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이루어놓은 것 없이 생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도전하는 자만이 쟁취할 수 있으며 위험을 감수한 만큼의 대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름답고도 치명적인 빛의 향연”
박영석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나지도 못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설벽에 매달린 채, 멀리서부터 가까이로 다가오는 먹장구름을 보며 공포를 느끼는 와중에, 어둠을 뚫고 번쩍거리는 번개 불빛을 표현한 구절입니다. ‘아름답고도 치명적인 공포와 황홀’ 그것은 그것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세계입니다.
비단 자연의 산뿐만 아니라 인생이라는 험난한 산을 오르고 있는 우리의 마음가짐도 이러해야 합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합시다. 극한의 고통을 이겨내며 새로운 진리를 찾아 탐험하는 자만이 마침내 정상에 올라 황홀한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2006 1.3 산비
“<바가바드 기타>는 삶의 규범일 뿐 아니라 사색의 체계이며, 진리가 인간의 영혼 속에 충만하게 하는 시도일 뿐 아니라 진리에 대한 지적인 추구이기도 하다.”
낯선 용어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독서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 안에 뭔가 있을 것만 같은 긴장된 흥분을 감지하면서 책을 읽어 나가고 있습니다.
“삶 가운데 문득 찾아오는 중대한 위기 상황은 우리의 마음속에 궁극적인 가치에 대한 생각을 자극한다. 오직 그때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감각의 장애를 깨부수고 내적인 실재에 닿는 데 필수적인 긴장을 얻게 된다.”
이성과 감성의 세계를 지나 새로운 세기는 靈性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영적 에너지의 순도와 강도를 높이기 위해 사람들은 명상을 하고 요가를 하고 선 수행을 합니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것도 영성을 강화시키기 위한 실제적 작업 중 하나일 것입니다.
“모든 것은 존재로부터 나오며, 이른바 파괴 혹은 소멸이라는 것은 단지 원래의 존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그 어떤 존재도 비존재가 될 수 없다.”
‘윤회설’이나 ‘영원회귀설’과도 상통하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존재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몰락과 파멸이 두렵지 않습니다. 단지 원래의 존재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이므로...
우리가 <우주 변화의 원리>를 공부할 때 한동석 님이 하셨던 것처럼 어떤 용어나 개념에 대한 정의를 하나하나 내리면서 공부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것을 ‘정명학’이라고 하던가요?그리고 인물들에 대한 계보를 도표로 작성해서 읽어나가면 좋을 듯합니다.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2006 1.4 산비
이달의 독서인으로 간서치라 불리던 ‘이덕무’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우리가 <미쳐야 미친다>를 통해 접한 인물이지요. 평생 2만 권의 책을 읽었다 하는데 제가 얼핏 계산해보니 66년 동안 매일 한 권의 책을 읽어야 해낼 수 있는 분량입니다. 참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정도의 속도로 책을 읽어나가면 1년에 약 100권 정도의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 봐야 10년에 1000권을 읽을 수 있을 뿐입니다. 어휴~ 부지런히 읽읍시다.
오늘은 오후 내내 <바가바드 기타>를 읽었습니다. 조금씩 재미있어집니다. 배경 설명을 읽은 뒤라서 그런지 책의 구성이나 전달 방식에 대해서 감이 좀 잡힙니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우선 용어들의 정의와 개념을 잘 잡아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래 몇 가지 중심 되는 개념들을 제목만 적어보았습니다. 그 용어가 무엇을 말하는지 되새겨보시고, 모르는 것은 찾아보시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질문해 보십시오.
*요가: 부디(이성), 쟈나(禪定), 즈나나(지식), 박티(신념), 산야사(離欲), 이 뱌사(實修), 삼캬(승법, 이론, 지식), 카르마(實修, 業, 有爲) / *요기(yogi), 육타(yukta)/ *크세트라즈나, 아비쟈(무지), 사마디(삼매)/ *프라크리티(非我)-푸루샤(自我)/ *brahmanirvana(범열반)
책을 읽다가 뒤통수를 번쩍 때리는 구절들을 발견하여 몇 개 옮겨봅니다.
“스스로 무리인 줄 아는 것은 이성으로 향해 나가는 첫걸음이다. / 불완전을 의식하는 것은 혼이 살아있는 증거이다. / 어떤 혼도 그 속에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그것이 어둠을 자극해서 맞서 일어나게 한다. / 일체의 애욕을 버리고 갈구하는 것도 없이, 나란 생각도 내 것이란 생각도 아니하는 사람은 평화에 이른다.”
브라만의 니르바나에 들어간 성자와 니체의 ‘위버멘쉬’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고 합니다. 즐거움, 정염, 내적인 힘과 해방의 의식, 용기, 끈질긴 목적의식, 신 안에서의 단절 없는 생활...
여기서 제가 특별히 주목하는 덕목은 ‘끈질긴 목적의식’입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업으로부터 해방되고,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없는 구도의 길을 동행하는 도반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끈질긴 목적의식’입니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열려있지만 대개는 그것을 찾으려는 열심이 없고, 열심은 가지면서도 의혹과 우유부단 때문에 떨어지는 사람이 많고, 또 의심치 않아도 난관에 부딪혀 나가버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난관이 오더라도 나가떨어지지 말고 악착 같이 달라붙어 진리를 깨우쳐봅시다.
2006 1.5 산비
오후 내내 고전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고전은 한 구절씩 읽어나가며 곱씹어보는 맛이 있어 즐겁습니다. 치매 예방에도 좋을 것 같습니다. 후후.
경전 한 구절 한 구절에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으로 추앙받는 것이겠지요. 현자들이 그 한 구절을 그대로 넘기지 못하고 해석을 답니다.
“사람이 무위에 이르는 것은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요.”
“생명이 있는 한 행동은 불가피하다. 생각함은 하나의 행동이다. 삶은 하나의 행동이다.”
우리가 도를 깨치기 위해서, 혹은 무위에 이르기 위해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음은 옳지 못하며, 그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욕망과 집착을 내버리고 모든 생명체와 하나 되어, 자기 속 생명의 무한한 깊음에서부터 행동하고 그의 영원하고 거룩하고 지극히 높은 자아의 주재 밑에서 하게 된다.”
해탈한 사람의 참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이슈카르마’의 지경을 말합니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필연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자기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거룩한 자아, 곧 지고자의 지시에 따르라고 말해줍니다.
“우리 모든 행동은 그 능력을 우리 자신의 것인 듯 가로챔 없이 자동적으로 하는 지경에 이르러야 한다.”
거듭되는 이야기지만 결국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진리를 이곳 <바가바드 기타>에서 또 만납니다. ‘오직 할 뿐’의 경지와 다 통하는 말입니다.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은 가려서 먹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그 반대로 가려서 먹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모름지기 우리의 현실 삶에 있어서의 실천적 덕목입니다. 우리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 해서 우리에게 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업신여길 자격은 없습니다. 무엇이 참 진리인지, 우리가 걷고 있는 그 길이 과연 정의이고 진실인지조차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런 우리가 누구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우리의 길을 묵묵히 갈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갖 충동대로 맘대로 하란 말은 아니다. 우리의 생명, 참을 찾아 그것을 나타내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이 구절을 읽으며 다시 한번 우리의 행위들을 자리매김해봅니다. 선악을 따져보기도 하고, 반성도 해보고 스스로 위로도 해봅니다. 우리가 아직 위버멘쉬적 삶에 이르지 못하고,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글을 읽다가 150쪽에 “인간 자유의 실행은 자연의 필연에 의해 조건이 붙는 것이지 말살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무슨 뜻인지 잘 와 닿지가 않습니다. 프로네 님의 도움을 바랍니다.
밖이 많이 어두워졌습니다. 이제 퇴근할 시간입니다. 오늘은 왠지 마음이 풍요롭고 충만합니다. 책을 열심히 읽어서 일까요? 좋은 밤 되십시오.
2006. 1.6 산비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프로네 님이 달아주신 주석을 보고 “아,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몇 가지 더 새로운 인식을 추가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 자유의 실행은 자연의 필연에 의해 조건이 붙는 것이지 말살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간 자유의 실행’입니다. 그것이 해탈이고 열반이며 우리가 궁극에 이르고자 하는 道입니다. 여하한 조건이나 억압에 의해서도 그것이 말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연의 필연에 의한 조건’이 어떻게 해서 성립되었는지는 프로네 님이 말씀해주신 바로 이해하였습니다. 다만 저는 그 조건을 다시 바로 앞 구절의 ‘의무감’과 결부시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나’와 업으로 인해 가지게 된 네 가지 ‘바르나’로 인해 갖게 된 조건이자 의무감이라고 해석해보았습니다. 그것이 여하하든 간에 ‘인간 자유의 실행’을 말살할 수는 없다, 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이 무집착의 상태 혹은 내버림은 한편으로는 행동자를 위해 영원한 자유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해 주고.../ 이 내버림의 상태야말로 거룩한 자와 인간을 위해 영원한 놀이터를 마련해 주는 자리다. / 신 의식 안에 있는 영원한 자유의 큰 바다에 한통쳐...”
‘내버림’에 대한 진리의 말씀들입니다. 참자유의 길이 거기에 있음을 깨우쳐줍니다. 우리는 내버림으로써 신들과 자유롭게 놀이터에서 같이 놀 수 있게 됩니다. 영원한 자유의 바다에서 신과 합일되어 존재하게 됩니다. 신과 한통속이 됩니다. 실로 경이로운 삶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르고자 하는 바로 그곳입니다.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하며 터득했던 번뇌를 벗고 해탈을 얻고자 했던 논리들, 진리들 즉 나를 잊어버리고, 행동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할 뿐의 진리를 이곳 힌두의 경전에서 다시 만나 그것들이 모두 집대성되고 결정체로 모아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참사랑, 참 행동, 참 자유, 참 자아...
요즘 ‘참’이라는 단어가 많이 끌리고 와 닿습니다.
2006 1.9 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