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스캇 펙 박사의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읽었습니다.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고통보다 균형을 잃는 것이 궁극적으로 더 고통스럽다.”
밸런스. 균형 있는 삶이 중요합니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 우리는 무언가를 포기하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나자빠지고 말 것입니다. 때론 전부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 애쓰기 때문에 번민과 집착이 생깁니다. 균형 감각이 요구되는 요즈음입니다.
“사랑이란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이다.” 사랑은 느낌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적이기보다는 의지적인 것이라고 스캇 펙 박사는 말합니다.
“참된 사랑이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해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사랑은 노력 없이는 안 된다. 사랑은 무척 힘든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사랑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관심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행동하는 만큼이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애착이나 사랑의 느낌과는 상관없이 실존하는 것이다. 참사랑은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압도되는 그러한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감 있게 심사숙고한 끝에 내리는 결정인 것이다.”
사랑한다면 서로를 존중하고 언행에 심사숙고하고, 책임감과 의지를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참사랑은 상대에게 집착하거나 상대를 압도하지 않고, 서로의 정신적 성장을 이끄는 창조적 상승 순환을 이루게 합니다.
“삶은 苦海이다.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 현명한 사람들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환영하며, 더 나아가서는 문제가 주는 고통까지 기꺼이 받아들인다./ 우리는 문제를 질질 끌면서 저절로 없어지기를 바란다. 무시하거나 잊어버리려 하고,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기려 한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피하려고 했던 바로 그 고통보다도 피하려고 하는 마음이 더 고통스럽게 된다.”
삶은 문제의 연속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시하고 질질 끌거나 외면하지 말고 문제를 직시하고 그 고통마저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스캇 펙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006 3.15 산비
스캇 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을 계속 읽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항상 사랑하는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존중하고, 더 나아가 그 개성을 격려해 준다. 그리고 자아의 확장을 포함하기 때문에 거대한 양의 에너지가 요구된다.”
참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 사람의 개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면서 나의 확장을 도모해 나가면 언젠가는 큰 교집합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확장이고 정신적 성장이다. 정신적 성장이란 작은 우주에서 출발하여 보다 더 큰 우주로 들어가는 여행이다. 작은 우주로부터 탈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인식 망을 확장하고 시야를 넓혀가야만 한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개인의 정신적 성장이며 정상으로 올라가는 이 고독한 여행은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자아의 정신적 성장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장의로의 여행은 철저하게 혼자 해내야 하는 일입니다. 마라톤 42.195km를 혼자 뛰어내야 하듯이. 다만 응원하고 격려해서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 그것이 사랑의 힘이고 사랑의 역할입니다.
2006 3.16 산비
얼굴에 닿는 훈훈한 바람이 봄을 인지하게 합니다. 어제는 메일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매일 글을 보내 읽게 하는 일이 혹 프로네 님의 아까운 시간을 축내는 일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저의 글이 혹 뜬구름 잡는 허허로운 이야기 같지는 않으신지요?
“우리 모두는 개별적 존재지만, 더 큰 전체의 부분들이고 어떤 광대하고 설명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합일되고 있다.”
서구의 사상은 개체와 개체를 개별적으로 보는 반면, 동양의 사상들은 개체와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 관계로 봅니다. 나와 너, 나와 우주를 각각이 아니라 동질의 존재로 인식합니다.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어떠한 경로를 통하고 거쳐서 결국 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왜 억압되었을까? 대답은 의식이 그것들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의식이 무의식을 원치 않을 뿐 아니라 자기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즉 문제는 인간이 이러한 감정들을 의식이 직면하기를 거부하고 또 그에 따르는 고통을 감수하기를 거절하여 그러한 감정들을 저 너머의 어두운 곳으로 밀어 넣어 버리려고 하는 바로 그것이다.”
의식이 옳습니까? 무의식이 옳습니까? 의식은 교육과 관습이고, 무의식은 본능이고 유전입니다. 스캇 펙은 무의식의 세계를 굉장히 높게 평가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것들도 무의식 속에 담겨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선조들로부터 DNA 핵산에 담겨 전해져 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깨닫는다.’는 말은 ‘다시 안다’는 뜻이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새삼 스러이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던 것을 알게 되는 배움이 아니라, 이미 우리 마음속에 담겨 있었던 것들인데 그것들이 모호하고 불확실하게 얽혀 있다가 어느 날 문득 그 의미가 확연해지고 명백하게 정의되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교육(education)은 ‘밖으로 드러내다’ 혹은 ‘앞으로 이끌다’의 뜻이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뭔가 새로운 것을 넣어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을 의식의 세계로 옮겨 나오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의식은 모든 지식의 창고였던 것이다.”
교육의 진정한 의미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육은 아이들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들을 밖으로 끄집어 내주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이미 있지만 스스로 억압하고 있는 꿈과 희망을 드러나게 하고, 비전을 갖게 해주는 것이 교육자의 참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애써 구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것의 소중함을 모른다.”
비단 공기의 중요함, 물의 중요함 같은 것들을 차치하고라도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은총을 받으며 은혜 속에서 우리 생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너무나 무심합니다. 가만히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그래도 살아갈만한 곳입니다.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2006 3.18 산비
<아직도 가야 할 길>의 마지막 장을 읽고 있습니다. 자기 훈련과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것을 연결하여 성장과 종교, 은총에 대해서 말합니다.
“게으름은 사랑의 반대말이다. 게으름은 우리를 끌어내리고 영혼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엔트로피의 힘, 원죄이다. 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이다.”
“논쟁을 벌여보는 것, 즉 심사숙고해 본다는 것은 고통과 투쟁의 길로 들어섬을 의미한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되는 기적을 믿어야 하는 당위성과 신의 은총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정말 그러한지 한 번 연구하고 심사숙고해 볼 것인지, 아니면 그냥 덮어버릴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아주 주도면밀합니다. 그냥 덮어버리는 것을 게으른 겁쟁이로 몰아붙이고서는 당신의 선택에 맡기겠다고 합니다.
과연 인간의 의식 밖에 존재하면서 인간의 영적 성장을 돕는 이 강력한 은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존재할까요?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가 내 안에 있다 함과 열반에 드는 것과 같은 것일까요? 프로네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를 새로운 영역, 새로운 행위, 새로운 관계, 새로운 차원의 존재로 확대하는 모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모험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도 두려운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두려움을 넘어서는 소망이 하나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시련과 고통을 인내하며 부단히 노력할 따름입니다.
2006 3.18 산비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을 끝냈습니다. 책 마지막 부분의 내용이 너무나 심오해서 정신이 얼얼합니다. ‘악이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주제를 나름의 논리와 통찰력을 발휘하여 심오한 정신세계로 끌어들입니다. 저자의 독창적인 논리 속으로 점점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거부하기 어려운 과제물이 제 앞에 놓인 느낌입니다.
스캇 펙은 우리의 무의식이 바로 신이며 하나님이고, 무의식의 신이라는 뿌리로부터 자라나는 의식의 새싹이 신 그 자체로 성장할 수 있다면 신은 전혀 새로운 모습의 삶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 개체의 존재 이유이며, 우리는 의식을 지닌 개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신이 되고자 태어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명징한 의식을 지닌 채로 신의 상태에 이르는 것.” 그것이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구원이고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인간의 존재 목적은 영적 성장이며 이것은 의식적 자아가 신성을 획득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즉 우리들 개개인이 모두 완전한 하나님 그 자체가 되는 것 말이다.”
인간의 존재 목적과 존재 이유에 대해 이토록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근거와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너무 간단하고 명료하게 말하므로 되레 의아해집니다.
“우리가 은총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은총을 소유할 순 없다 해도, 은총이 기적처럼 올 때 우리 의지로 자신을 열어놓을 수는 있다는 점이다.”
부처도 해탈하려는 노력을 멈추었을 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해탈이 그에게 오도록 한 것이지요. 은총의 축복도 우리가 찾아 헤매면서 또 찾지 않을 때 뜻하지 않게 오는 선물이라 합니다. 어렵습니다. 무슨 선문답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영적 성장의 여행은 용기와 주체성, 생각과 행동에서의 독립심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예언자의 말이나 은총이 얼마간 힘이 되겠지만 그 길은 반드시 혼자 가야 할 길이라 하네요. 영적 성장을 통해 신성을 얻고 하나님에 이르는 길이 우리가 <아직도 가야 할 길>입니다. 그 길을 중단 없이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Dilige et quod vis fac : 당신이 사랑할 수 있고 부지런하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2006 3.21 산비
파울로 코엘료 가 쓴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베로니카'라는 한 여성이 죽기로 결심하고 약을 먹지만 죽지 않고 정신병원에 실려와 치료를 받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그녀가 심장에 너무 큰 손상을 입어서 1주일밖에 살 수 없을 거라고 이야기해줍니다.
어차피 죽으려고 했는데, 1주일이 지나면 어차피 죽을 텐데. 하지만 예정된 죽음이 24시간 뒤로 다가오자 삶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생의 마지막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는 자각. 그렇습니다. 작가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자각이 인간의 삶에 대한 자세를 얼마나 치열하게 만들어 놓는지...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그날이 40년쯤 후가 될 수도 있고, 40일 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생의 마지막이 저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아니 뻔히 보이지만 애써 무시한 채 하루를 무의미하게 흘려보내 버리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내 젊은 날에 이 문제를 즉, 삶과 죽음과 영혼과 내세와 자유와 본능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니체를 읽었고 샤르트르와 야스퍼스, 하이데거에 탐닉했으며, 성경을 붙들고 머리를 드밀며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덤벼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한동안 묻어놓았습니다. 결론 없는 토론에 지쳐서, 목줄을 죄는 현실에 항복하여, 눈앞의 일 처리에 급급하여 그리고 가족에 안주하며 나로서는 정도를 걷고 있는 것이라고 자위하고 말았습니다.
인생 사십의 문턱에 다다라, 사십의 문을 열기 전에 잠깐 뒤를 돌아보니 삶이 참 허무해졌습니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이기적으로 살았던 것인지, 그래서 내가 얻어낸 것은 무엇인지’ 회의가 일었습니다. 묻어 두었던 삶의 실체와 진실에 대한 고민을 다시금 꺼내들게 되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현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책을 들었습니다. 책 읽기에 빠지니 시간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습니다. 하루하루 일분일초가 참으로 값진 시간들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 궁금해지고 더 알고 싶어 집니다. 하나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상념에 빠져들게 합니다.
책을 읽다가 번개를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나와 똑같은 문제로 고민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게 참 신기합니다. 저는 요즘 스님들이 동안거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용맹정진을 하듯, 기독교인들이 성령이 임하기를 고대하며 부르짖듯 진리를 갈망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때워 가듯 무미건조하게 살기보다는, 언젠가는 나에게도 이 세상과 작별하는 마지막 날이 닥쳐오리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자각하며, 그날 결코 후회하지 않기 위해 보다 격정적으로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2006 3.23 산비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완독 하였습니다. 원제가 < THE EDUCATION OF LITTLE TREE >인데 다 읽고 나니 왜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의역된 우리말 제목도 잘 붙여진 것 같고요.
글이 중반 이후까지도 덤덤하고 잔잔하게 이어지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 격동을 일으킵니다. 주인공 '리틀 트리'에게 시련이 닥치며 벌어지는 상황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할아버지, 나 집에 가고 싶어요”
진정한 교육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위선과 가식의 탈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하게 합니다. 아이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어떤 배움이 삶에 정말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영혼이 통하는 사람끼리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밤하늘의 저녁별을 동시에 바라보며 염원하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혹 무슨 변고가 생겼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밤이 내려앉습니다. 좋은 밤 보내십시오.
2006 3.27 산비
날이 많이 풀렸습니다. 따사로운 햇빛이 빛나는 봄의 아침입니다. 누렇게 바랬던 잔디밭에도 조금씩 파릇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겨우내 시들시들하던 제 방 화초들도 싱그러운 힘을 회복한 듯합니다. 동양란 한 포기에서 꽃대가 올라오나 싶더니 예쁜 꽃을 피워냈습니다. 무척 아름답습니다.
어제 < TV 책을 말하다 > 프로는 혹시 보셨는지요? 정재승, 김갑수, 김누리, 한비야, 문용린. 지면에서만 대하던 사람들을 TV 화면으로 보게 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신문에 소개되는 서평 뒤에 정재승 이나 김갑수라는 이름이 자주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책을 읽고,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는지 궁금했었습니다. 한비야 씨의 말처럼 좋은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읽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듭니다. 마치 신앙 세계 속에서 어떤 기쁨을 발견하면 그것을 전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처럼.
저도 어릴 때부터 책을 제법 읽은 편이지만 정작 책 읽는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책 속에서 진리의 말씀을 발견하면 몸에 전율이 흐릅니다.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얻게 되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책 속에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삶과 인생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 주고 그것을 한번 해보도록 용기와 꿈을 심어줍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배운 만큼 얻게 됩니다.
“至樂 莫如讀書”
지극한 즐거움은 책을 읽는 것만 같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좀 더 힘을 내서 서로를 격려하고 채찍질하며 열심히 함께 책을 읽어나갑시다.
2006 3.28 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