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

by 산비

눈발이 날리고 있는 2월의 마지막 날 아침입니다. 겨울의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내일부터는 봄의 시작입니다. 늘 마지막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애잔한 감흥을 가지게 합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마지막은 항상 새로운 시작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또 다른 의미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라는 책 읽어보셨는지요? 오늘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몇 장 펼쳐보았는데 느낌이 아주 좋습니다. 이 책은 수많은 상을 휩쓸고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150개 나라에서 총 6천5백만 부가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서문과 역자의 후기를 먼저 훑어보았습니다. 세 개의 구절이 핵심으로 여겨집니다. ‘위대한 업’ ‘우주의 언어’ 그리고 ‘자아의 신화’ 이 세 구절의 의미를 정밀하게 파악하는 것이 이 책을 읽으며 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달음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고, 남 보기에는 초라한 인생이라도 한 사람의 삶은 그에게는 단 한 권뿐인 역사책만큼이나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자아의 신화’를 좇아 사는 사람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우주의 언어를 이해하고 자신의 자아의 신화를 올바르게 알아 그것을 온전히 이루어내는 일, 그것이 바로 삶의 연금술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절망의 바닥에서 비로소 신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우리가 마음 깊이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마침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이었다.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그 많은 시련과 시험에도 불구하고 신의 손길은 언제나 한없이 자애롭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굉장히 역설적입니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그 울림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배워왔는데, 여기서는 우리 마음이 거부하는 일을 결국 우리가 받아들이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운명이란 과연 그런 것일까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영적 구도서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는 이 책을 진지한 마음으로 오늘부터 열심히 읽고 깨달음을 얻어 보겠습니다.


2006 2월의 마지막 날 산비



<연금술사>를 읽고 있습니다. 책이 참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영혼을 일깨우고 마음에 울림을 줍니다.


“이 세상에는 위대한 진실이 하나 있어.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거야.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게 이 땅에서 자네가 맡은 임무라네.”


꿈은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이 우주는 온 힘을 다해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준다고 합니다. 먼저 우주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주는 그것을 알려주려 애쓰는 데 오히려 우리는 그 소리를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주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실현시켜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임무입니다.


“산티아고는 새롭게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었다. 전에 경험했던 것들도 있었지만 길을 떠난 후에 새로운 눈으로 새삼스레 그 숨은 의미를 깨치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그전에는 너무 익숙해 아무런 깨달음도 주지 않았던 것들로부터.”


길을 떠나야 합니다. 그래야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길을 떠나면 이미 전에 알고 지냈던 것들, 너무나 익숙해 무감각했던 것들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것의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배우는 거야. 저 사람의 방식과 내 방식이 같을 수는 없어. 하지만 우리는 제각기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길이고, 그게 바로 내가 그를 존경하는 이유지.”


전에 제가 한 번 말씀드린 것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프로네 님에게는 프로네 님의 방식이 있고 저에게는 저의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제각기 각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자아의 신화를 좇아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제가 당신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만나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모든 과거와 미래는 의미를 잃고 오직 현재의 순간만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손에 의해 쓰였다는 믿을 수 없는 확신만이 존재하게 된다. 우주의 언어로 소통하는 그러한 사랑 없이는 어떠한 꿈도 무의미할 것이다. ‘마크툽’ ”


우리의 만남도 이미 오래전에 정해져 있던 일입니다. ‘마크툽’ 편안한 밤 되십시오.


2006 3.3 산비



날이 다행히 많이 풀렸습니다. 버스를 타고 오며 <연금술사>를 마저 다 읽어냈습니다. 가슴이 뭉클하더이다. 자아의 신화를 찾아 먼 길을 떠났던 산티아고는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그의 영혼과 교감하는 사막의 여인을 만나 운명처럼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고민합니다. 이제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중단하고 그녀와 결혼하여 그곳에 머무르려 합니다. 그때 그의 스승 연금술사는 그에게 길을 떠날 것을 부추기며 이렇게 말합니다.

“명심하게.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한 남자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네.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만물의 언어를 말하는 사랑,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지.”


마침내 마음에 결심을 한 산티아고가 그의 여자 파티마에게 작별 인사를 합니다. “난 떠납니다. 내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걸 믿어주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대를 사랑한 것은......” 그때 파티마가 그의 말을 가로막고 말합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일 뿐, 사랑에 이유는 없어요.”


결국 갖은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산티아고는 보물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책 <연금술사>의 맨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 파티마, 기다려요. 이제 그대에게 달려가겠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깊은 감동의 물결이 밀려왔습니다. 이 책의 일독을 강력히 권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정작 가장 큰 꿈들이 이루어지는 걸 두려워한답니다. 자기는 그걸 이룰 자격이 없거나 아니면 아예 이룰 수 없으리라고 예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도전은 처음엔 언제나 ‘초심자의 행운’으로 시작하지만 , 반드시 ‘가혹한 시험’을 받아 중도에 좌절해버리고 니다. 그걸 이겨내고 자아의 신화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는 사람만이 우주의 언어를 이해하고 우주의 만물과 한 몸이 되어 평화롭고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궁극은 결국 ‘사랑’ 임을 알게 됩니다. 정말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며 사랑하며...


2006 3.4 산비


- 월든 -


곡기穀氣를 채우는 게 산업화 시대의 과제라면 文字氣를 채우는 것은 정보화 시대와 지식사회의 과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문자기에 관한 한 속이 비었으면서도 좀처럼 허기를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매끄럽거나 거친 질감, 책장을 넘길 때 풍겨오는 냄새, 손으로 집을 때 느끼는 무게감. 이런 오감으로 종이에 새겨진 문자의 결과 맥을 느껴보기보다는 클릭 한 번으로 모니터에 반짝 뜨는 조각난 정보에 기꺼워한다는 것이지요. 읽기에서도 슬로푸드보다 패스트푸드에 인이 박여드는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책을 읽는 즐거움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오호라'하며 마음속에서 놀라움의 탄성을 지를 수 있게 하는 한 구절을 만났을 때의 기쁨이 가장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 다치바나 다카시


제 마음이 그 마음입니다. 책을 읽어나가다가 번득 뇌를 자극하는, 가슴을 울리는 한 구절을 맞닥트렸을 때의 기쁨과 감동. ‘맞아, 그렇구나, 그렇지, 그랬던 거야’ 어쩌면 이미 한 번쯤 언뜻 스쳐지나갔었던 생각일 수도 있는데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책 속에서 그것을 구체화시켜주는 구절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무릎을 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연금술사> 나 <지구별 여행자>처럼 순간순간 삶의 진리를 밝혀주는 책들이 좋습니다. 밑줄 그을 문장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책을 읽게 됩니다.


책을 열심히 읽은 날은 마음이 넉넉해지고 머리에 뭔가를 채워가는 느낌이지만, 그렇지 못한 날은 마음이 허전하고 숙제를 다 마치지 못한 께름칙한 기분이 듭니다. 오늘이 그렇습니다.


2006 3.6 산비



날이 저물고 있습니다. 안식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밤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새벽 공기 한 모금이 우리의 원기를 북돋우고 의지를 자극하는 청량제라면, 밤은 그윽하고 감미로운 한 잔의 차와 같습니다. 차분한 봄의 밤입니다. <월든>을 읽고 있습니다.


“사색을 함으로써 우리는 건전한 의미의 열광 속에 빠질 수 있다. 마음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우리는 행위들과 그 결과들로부터 초연하게 서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만사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격류처럼 우리의 옆을 지나치게 된다.”


행위의 결과로부터 초연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며 공부한 내용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사색과 몰입입니다. 순수하고 건전한 자세로 열광 속에 빠져드는 것. 그래서 그 자체만으로도 그 과정만으로도 즐겁고 보람 있는 것. 그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떠한 관찰 방법과 훈련도 항상 주의 깊게 살피는 자세를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볼 가치가 있는 것을 그때그때 놓치지 않고 보는 훈련이 중요하다. 당신 앞에 놓인 것을 보고 당신의 운명을 읽으라. 그리고 미래를 향하여 발을 내디뎌라.”


우리는 대체로 정신을 놓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정작 봐야 할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좀 더 세심하게 주위를 살피고 눈여겨보는 습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프로네 님도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주위의 사소한 변화, 미물의 움직임을 천천히 주의 깊게 살피는 습관을 가져보십시오.


“나의 경험이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나는 나의 일부분이면서 나의 일부분이 아닌 것처럼, 나의 경험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단지 방관자로서 메모를 하고 있는 어떤 부분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고 있다.”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입니다. 나와 대화하고, 나를 비난하고, 나를 유혹하고, 나를 격려하는, 나의 일부분이면서 내가 아닌 ‘나’가 내 안에 분명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악마의 모습으로 때로는 수호천사가 되어 나와 함께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아의 신화’ 또는 고귀한 자아 ‘아트만’일까요? 명상과 사색을 통해 좀 더 생각을 정리해보아야겠습니다.


2006 3.7 산비



또 하루가 저물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해가 뜨고 해가 집니다. 시곗바늘은 자기의 괘도를 따라 멈추지 않고 회전합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만 갑니다. 오늘 하루는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늘 다짐하지만 매일을 새로운 마음자세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나는 고독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바다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고, 이 바다로 사교라는 이름의 여러 강들이 흘러들었다. 그러나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따져볼 때, 대체로 가장 훌륭한 침전물이 내 주위에 와서 쌓였다. 게다가 바다 저편에는 아직 탐사되거나 개척되지 않은 대륙들이 존재한다는 증거들도 떠내려 오곤 했다.”


소로우가 혼자 은둔하는 것처럼 호숫가 오두막에서 살기는 했지만 자신을 찾아오는 방문객이 무척 많았다고 합니다. 그것을 ‘고독이라는 바다에 사교라는 강물이 흘러들어온다.’고 표현합니다. 참 멋스러운 표현입니다. 결국 강물도 바다에 흘러들어오면 바닷물이 됩니다.

인간의 본질은 고독이며 이 근원적인 고독함이 나를 관장하고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다도 계속해서 강물이 흘러 들어와야 바다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바다에 강물이 흘러들어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인 호수처럼 되어 썩어갈 것입니다. 다만 될 수 있으면 맑은 강물이 흘러 들어와 훌륭한 침전물들이 나의 바다에 쌓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의 생각이 다른 천체들의 방대하고 우주 생성론적인 문제 주위를 방황하고 있을 때, 고기가 낚싯밥을 무는 가벼운 충격을 느끼면서 몽상에서 깨어나 자연과 다시 연결이 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체험이었다.”


<월든>을 읽으며 놀라는 것은 소로우의 섬세한 관찰력입니다. 아주 사소한 것들, 예를 들어 물속의 물고기들, 피라미들, 물가에 자라는 나무들, 풀들, 호수의 색깔, 깊이, 넓이, 하늘을 나는 새들, 집 근처를 지나는 나그네들, 그들이 내뱉는 하찮은 말들, 밤에 우는 부엉이와 그 밖의 소리들, 콩밭의 잡초들... 뭐든 하나하나가 관찰의 대상입니다. 그것들을 통해 인간과 우주에 대한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나갑니다. 그렇게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다가 낚싯대의 흔들림에 문득 깨어납니다. 3차원과 4차원을 넘나드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무나 표면적인 문제에 매달려 단세포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살다가 그저 그렇게 죽어갑니다. 우주의 언어를 알아듣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나는 아래쪽의 물속은 물론 위쪽의 하늘로도 낚싯줄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리하여 나는 낚시 한 개로 두 마리의 물고기를 낚았던 것이다.”


영화 ‘연풍연가’에 보면 낚싯줄을 하늘로 던져 갈매기를 잡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문득 그 장면이 상상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우리도 낚싯대를 물아래로만 던질 것이 아니라 물 위로도 던질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못할 것도 없습니다. 단지 시도해보지 않았을 뿐. 지금부터라도 해보는 겁니다. 하늘 위로 힘차게 던져봅시다.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일이 참으로 즐겁습니다. 제 편지를 읽어보시고 공감이 가는 내용이나 다른 생각이 있으시면 답장에 써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혹여 제 생각들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바로잡아 주십시오. 저의 나침반이 되어주세요.


2006 3.8 산비



날이 저물고 있습니다. <월든>을 끝냈습니다. 자연의 일상과 변화를 그려내는 필치가 헬렌 켈러 마냥 섬세하고 경이롭습니다.


“내가 숲 속에 산 지 일주일이 채 안 되어 내 집 문간에서 호수까지는 내 발자국으로 인해 길이 났다.”


지금껏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내가 걸어서 길을 새로 만드는 것. 정말 멋진 일 아닙니까? 그렇게 길을 내놓고 5-6년 후에 가보았더니 아직도 그 길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소로우가 만들어 놓은 길을 또 누군가가 밟고 지나가면서 그 길이 없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던 것이지요. 박영석 대장도 히말라야 에베레스트를 정복할 때 이미 만들어진 길을 가기보다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일이 자신의 꿈이라고 말하였지요. 그런 도전 정신과 개척 정신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내게는 살아야 할 또 다른 몇 개의 인생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꼈으며, 그리하여 숲 생활에서 더 이상의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살아야 할 또 다른 몇 개의 인생’ 멋진 말입니다.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몇 개의 또 다른 인생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신세계’가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비록 그것을 다해볼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보다 넓은 세상, 새로운 세상을 좀 더 많이 겪어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꿈의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며, 자기의 그리던 바의 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보통 때는 생각지도 못한 성공을 맞게 되리라. 새롭고 보편적이며 보다 자유로운 법칙이 그의 주변과 내부에 확립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자신감을 가지고 노력해나가면 반드시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고 보편적이고 자유로운 법칙’을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의무감으로 느끼는 것을 말하지 말고 진실로 내부에서 느끼는 것을 말하라. 어떤 진실도 거짓보다는 낫다.” 결국 진실은 밝혀지는 것이고, 거짓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그것을 은폐하는 것보다는 문제를 솔직히 고백하고 정면 돌파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2006 3.14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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