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짓고 등불을 닦는 일상
박수받지 못할 노동에 연민을 담고, 고단한 훈육에 좌표를 새기며, 깊은 밤 홀로 등불을 닦아 '나'라는 주체를 증명하는 일상에 관하여.
매일 아침 식탁을 차리고 흐트러진 집안을 정돈하는 일은, 가장 반복적인 노동이다. 때때로 이 반복은 주체를 지워버리는 피동적인 성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유의 렌즈로 이를 들여다보면, 이는 에덴에서 쫓겨난 자들에게 신이 건네주었던 '가죽 옷(창세 3,21)'을 매일 아침 새로 짓는 일과 같다.
가족들이 광야 같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
부끄러움을 가리고 추위를 견딜 최소한의 존엄을 입혀주는 일.
나의 가사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생존을 보호하는 가장 근원적인 연민의 발현이다.
나는 오늘 아침, 그들의 가죽 옷을 짓는 일에 기꺼이 성실했다.
이 성실은 박수받지 않는다.
그러나 묻히지도 않는다.
아이들의 학습을 점검하고 그들을 독려하는 시간은 늘 고단하다. 그러나 이는 아이들이 훗날 안개 낀 숲 속에서 스스로의 등불을 켜야 할 때, 길을 잃지 않도록 그들의 몸에 '좌표'를 새겨주는 작업이다.
신이 카인에게 표를 주어 그를 유랑하게 했듯, 교육은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세상의 음지를 대면할 수 있는 지적 근력을 키워주는 과정이다. 나의 독려는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시스템의 결괏값으로 전락하지 않고 스스로의 등을 비추는 등불을 들 수 있도록 돕는 성실이다.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은 종의 성실을 성과가 아니라
맡김에 대한 태도로 판정했다. (마태오복음 25장)
종들 가운데 달란트를 잃은 자는 없었다. 다만,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은 종이 있었을 뿐이다.
모든 일과가 끝난 후, 사유의 조각을 붙잡는 이 시간이야말로 내가 비로소 ‘나’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가사와 양육이 타인을 향한 헌신이었다면, 사유는 내 자신의 등을 스스로 비추어보는 주체적 행위다. 사유 없는 성실은 나를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만들지만, 사유가 깃든 성실은 나를 광야의 개척자로 만든다.
나는 오늘 밤, 안개 낀 숲 속에서 나의 좌표를 확인하기 위해 부단히 등불을 닦고 있다. 타인의 등에 비칠 나의 등불이 어둡지 않도록, 그리고 누군가 나의 등을 비춰줄 때 그 좌표가 선명히 드러나도록 말이다.
오늘 당신의 성실점수는 몇 점인가.
사실 점수는 중요하지 않다.
나의 성실은 깨끗해진 거실 바닥이나
아이 시험지의 정답률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가족의 존엄을 지켜낸 나의 연민으로,
아이의 미래를 설계한 나의 책임으로,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글로 길어 올린
나의 사유로 증명된다.
오늘도 나는 사유 없는 성실의 저주를 깨뜨리고,
주체적인 평화를 일궈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