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가시관의 평화

등을 비추는 자들의 광야

by 떨뇌지

​에덴, 변명하는 자들의 비겁한 안식처

내가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창세 3,11)

​에덴은 낙원이 아니라 피동성으로 도망친 자들의 현장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주체적으로 책임지는 대신, 타인의 의지 뒤로 숨어 '남 탓'과 '변명'을 발명했다. "당신이 준 여자 때문에"라는 아담의 고백은, 자신의 음지를 응시할 용기가 없는 자가 선택한 최초의 책임 외주화였다. 그들이 갈구하는 안온함은 사유의 평화가 아닌, 결점 없는 완벽함이라는 허상을 지키기 위한 방치된 상태일 뿐이다.



​자유의 공포와 연민의 설계

주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창세 3,21)

​피동성의 커튼을 걷고 광야로 나가는 것은 해방이 아니라 서늘한 공포로 다가온다. 내 삶의 모든 결과가 오롯이 나의 책임이 되는 '자유의 공포' 때문이다. 신은 이 고독한 주체들을 위해 연민을 설계했다. 그것은 외롭지 말라고 짝을 지어준 감상주의가 아니라, "서로의 등을 보라"는 엄격한 명령이다. 인간은 구조적으로 자신의 등을 볼 수 없다. 오직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나의 비겁함과 음지의 문제를 인지할 수 있다.



오만한 손절과 등불의 의무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으리라.'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창세 4,15)

​현대인들은 정신건강을 이유로 타인을 쉽게 '손절'한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음지를 비춰줄 거울을 스스로 깨뜨리는 오만이다. 회피하는 자가 등불을 끄고 도망칠지라도, 내가 나의 등을 보려 부단히 애쓰며 등불을 높이 들고 있다면, 신이 설계한 연민의 원리에 따라 또 다른 누군가가 나의 등을 비추러 올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도망치는 자의 빈자리에서도 등불을 내리지 않아야 하는 구조적 이유다. 카인에게 새겨진 표식은 타인의 등불이 가닿아야 할 곳을 알리는 연민의 이정표인 것이다.



십자가, 가시관이 주는 평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

​예수가 최후에 만찬에서 남긴 평화의 메시지는 에덴의 안락함이 아니다. 그것은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평화다. 타인의 평가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가 일으키는 모든 고통(음지)을 기꺼이 짊어지는 주체적 평화다.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이 스스로의 등을 보지 못해 방황하고 있음을 연민하며, 죽음의 순간까지 타인의 등을 비추는 등불을 끄지 않았던 십자가의 기록. 그것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평화의 실체다.



​여기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평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창세 12,1)

​신은 우리에게 완벽한 평화를 주지 않았다. 대신 평화를 얻기 위한 '기회'를 주었다. 그 기회는 내게도 보이지 않는 추한 등이 있음을 인정하고, 타인의 어두운 등을 비추는 수고를 멈추지 않는 자에게만 허락된다. 가시관의 무게를 견디며 서로의 등을 응시하는 이 치열한 광야의 연대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비겁하지 않은 진짜 평화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에덴을 떠난 인간은
더 이상 변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질문하는 주체가 된 것은 아니었다.

광야에서 인간은 ‘왜’를 묻는 법보다
주어진 몫을 묵묵히 수행하는 법을 배웠다.

성실은 미덕이 되었고,
사유는 점점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그 침묵의 성실은
어디까지 우리를 데려갈까?

사유 없는 성실은
언제든 연대를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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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 미덕으로 강조되는 성실이 동료를 배반한 현장은 <사유 없는 성실의 저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