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을 지워낸 카인의 알리바이
아담이 신에게서 받은 벌은 노동이었다. 그러나 카인이 물려받은 것은 노동이 아니라, 사유 없는 성실이었다.
카인은 질문하지 않았다. 왜 제물을 바쳐야 하는지 묻지 않았고, 신이 무엇을 원했는지 따지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주어진 징벌을 묵묵히 수행한 사람이었다.
아담이 "저 여자가 시켰다"며 책임을 회피했다면, 카인은 아예 책임질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기 위해 시스템의 규칙을 충실히 따랐다. 그의 성실함은 신을 향한 경외가 아니라, 낙오되지 않으려는 처절한 피동성의 발현이었을 뿐이다.
아담으로부터 대물림된 이 비극은 결국 연대 지능이 적출된 인류 최초의 살인 보고서로 귀결된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창세기 4,9)
카인의 대답은 아담의 비겁함과 맥을 같이 한다. 카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의 확장판이다. 신의 벌을 충실히 이행하던 카인과 목축이라는 새로운 길을 낸 아벨 사이의 갈등에서, 전능한 창조주는 다시 한번 인간에게 사유를 요구한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느냐? 네가 올바르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갈망하며
너를 지배하려 할 것이다. 너는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
(창세기 4,6-7 요약)
이 말은 분노를 억제하라는 도덕 훈계가 아니다. 남 탓을 멈추고 내면의 주권을 회복하라는 인간을 향한 두 번째 통첩이다.
카인은 신이 정한 규칙(제사)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그러나 그가 제물을 쌓고 불태우는 얼굴에는 아무런 의구심을 담지 않았다. 제물에 담겨야 할 '생명에 대한 경외'나 '동료(아벨)와의 공감'은 거세된 채, 오직 규칙의 집행만이 남았다. 그에게 아벨은 함께 살아가는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시스템의 채점 기준이었을 뿐이었다.
신의 거절은 카인에게 단순한 낙방이 아니라 존재의 붕괴였다. 카인은 절규했다. '나는 규칙대로 땅을 일구었는데, 왜 내 제물은 받지 않는가!' 이 절규는 신에 대한 반항과 투쟁이 아니라, 입력값에 따른 출력값이 산출되지 않은 기계적 오류 보고였다. 주체적으로 사유하며 자신만의 언어를 쌓아온 자라면 거절 앞에서 "왜?"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스템의 숙제만을 복사하듯 수행해 온 카인에게는 자신을 재구성할 언어가 없었다.
스스로를 설명할 언어가 없는 자가 마주한 좌절은 분노로 바뀌고, 그 칼날은 매뉴얼이 아닌 가장 만만한 연대자에게 향한다. 폭력이 동생을 향하지 않고는 갈 곳이 없었던 이유는, 카인이 시스템을 비판할 주체적 사유의 회로가 처음부터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인의 범죄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유 없는 성실'이 연대 지능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첫 번째 증거다. 규칙 준수와 효율성만 따지는 성실함은 필연적으로 곁에 있는 타인을 ‘고통을 느끼는 주체’가 아니라, 내가 넘어서거나 제거해야 할 ‘데이터값’으로 치환해 버린다.
오늘날 우리가 성과 지표를 성실히 수행하며 동료의 탈락을 시스템의 정당한 결과로 수용하는 모습은, 수천 년 전 들판에서 아벨을 지워냈던 카인의 눈빛과 겹쳐 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아벨을 죽인 카인이라기보다 아벨을 외면한 카인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시스템은 질문하지 않는 성실함을 미덕이라 부르고, 서로를 경쟁자로 만들며 통치의 효율을 높임으로써 우리를 주체성을 상실한 비루한 인간으로 환원시킨다.
우리는 누군가를 해치겠다는 의지 없이도, 그저 내게 주어진 성과 지표를 채우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아벨을 지워내고 있다.
아담의 피동성은 카인에게 이어졌고, 카인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닌 '사유 없는 성실'이라는 새로운 징벌을 물려받았다. 이 징벌은 수천 년 후 현대의 조직 속에서도 반복된다. 그리고 가장 효율적인 '비극의 집행 도구'로 진화한다. 이제 우리는 그 '사유 없는 성실'이 만들어낸 역사적 실체와, 그것이 현대에 어떻게 반복되는지를 마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