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부품의 공포

사유하지 않는 악의 탄생

by 떨뇌지

아담의 비겁함이 '책임 전가'였다면, 카인의 살인은 '무감각한 성실함'의 시작이었다. 이 구조적으로 대물림된 비겁함과 무감각이 현대 사회의 정교한 시스템과 결합했을 때, 우리는 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1961년 예루살렘 재판정에 선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은 나치 체제에서 누구보다 ‘모범적 공무원’이었다. 그가 처리한 것은 학살이 아닌 열차 편성, 수송 인원 조정, 행정 문서 처리였으며 그는 그것을 효율적으로 수행했다고 진술했다. 아이히만의 말에 따르면 그에게 유대인은 처리해야 할 '물류 데이터'에 불과했다.

한나 아렌트는 재판을 지켜보며 그의 기이한 성실함 앞에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판단을 중단한 채 기능을 수행한 인간의 모습에 주목한 것이다.


시스템으로 반납된 주체성과 전문적 무책임

아이히만에게 결여된 것은 도덕적 감수성이 아니라 바로 ‘사유’였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결정이나 판단이라기보다는 '이행'으로 설명했다.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성'을 시스템에 통째로 반납한 채, ‘피동자’의 정점에 서서 학살을 성실히 이행했다.

주체적 판단의 상실이 만들어내는 잔인한 연쇄는 밀그램의 실험에서도 반복된다. 평범한 시민들은 ‘학습 효과를 위한 전기 충격’이라는 시스템의 매뉴얼 앞에서, 옆 방의 비명 소리보다 실험자의 "계속하십시오"라는 명령에 더 충실했다. 그들은 가해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중단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지도 않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이 문장은 행위의 주체를 개인에서 구조로 이동시킨다. 그 순간 개인은 판단자가 아니라 매개자가 된다.

밀그램의 실험은 주체성을 상실한 개인의 잔혹함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라는 주체를 시스템의 ‘기능’으로 환원하는 순간, 구조 속에서 고통을 함께 멈출 수 있는 '연대 지능'이 제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통받는 아벨 앞에서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물었던 카인의 냉소는, 현대 조직에서 “나는 프로세스를 준수했을 뿐입니다”라는 전문적인 무책임으로 세련되게 복제된다.


고립된 군중을 깨우는 주체적 선택의 힘

아이히만과 밀그램의 피실험자들이 보여준 비극은 분명하다. 주체성이 거세된 성실함은 연대가 아닌 ‘공모’를 낳는다. 시스템은 우리가 서로 손을 잡는 대신, 각자의 칸막이 속에서 성실히 시스템의 명령대로 버튼을 누르는 ‘고립된 군중’이 되기를 요구한다. 여기서 문제는 성실함 그 자체가 아니다. 규칙을 따르는 과정에서 판단이 보류되는 순간이다.

판단이 중단되면 타인은 관계의 대상이 아니라 절차의 변수로 재배치된다. 그 변화는 급진적이지 않다. 대개는 조용하게 일어난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전문성'은 조직 운영에 필수이다. 다만 그 안에서 개인이 스스로의 판단을 유보할 때,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희미해진다.


바츨라프 하벨은 “힘없는 자의 힘”에서 야채장수 우화를 통해 개인의 주체적 판단에 대하여 말한다. 쇼윈도에 붙은 가짜 체제선전구호를 떼어내는 행위, 즉 ‘거짓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개인적 '반항'은 다른 개인들에게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사유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개인의 행위는 체제선전 문구에 대한 동의를 철회하는 식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저서 <반항하는 인간>에서 데카르트의 명제를 비틀어 연대를 정의한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내가 주체적으로 반항함으로써 타인의 존재를 증명해 내는 지적인 투쟁이다."

카뮈가 말하는 연대하는 인간은 고통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기 위해 멈춰서는 자이다. 시스템의 규칙을 지키는 성실함이 아니라 행동과 책임을 공유하겠다는 결단이다. 이 지점에서 카뮈의 연대는 아이히만의 성실함과 명확히 갈라진다. 자신의 판단을 타인이나 구조에 위임하지 않는 자세에 가깝다.


시스템은 계속 작동하며 규칙도 필요하다. 다만 그 안에서 개인이 어디까지를 '이행'으로 두고, 어디서부터를 '판단'으로 남겨야 할까. 어쩌면 균열은 거창한 저항이 아니라 그 경계를 정해 보려는 시도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사유 없는 성실의 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