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한 가장 유명하고, 유능한 의사가 다정함과 단호함을 섞어 나의 희귀 난치병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첫날이기 때문에, 나는 늘 모든 일의 기준을 저 날로 잡곤 한다.
예전에 공효진과 차승원이 나온 드라마를 엄청 좋아했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봤었는데, 그 언젠가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가 그 드라마가 마주쳐서 잠깐 멈추어 놓고 봤다. 벚꽃이 휘날리는 장면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그 시절의 내가 저 장면을 보며 느꼈었던 모든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때 나는 하염없이 구애정과 독고진의 감정에 젖어들었었다. 대체 언제 적 드라마인가 검색해 보고 나서야-무려 2010년 드라마였다-, 멍청하게 사랑을 꿈꾸던 그때의 나는 건강했었기에 그럴 수 있었구나 싶어서 씁쓸했다.
ESRD. 말기 신부전 5기.
그런 나에게 가장 먼저 주어진 선택지는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였다.
선택하기도 전에 여기저기 실려 다니며 가슴에 카테터 관을 삽입하고, 첫 투석도 강제로 받고 별일이 다 벌어졌지만, 그래도 죽음과 삶은 그때도 지금도 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처음에 죽으려고 했었다.
밤이 되어도 강남 한복판에 있는 대학병원은 사람이 많았다. 내가 있던 12층은 이식 환자들이 있는 이식병동이어서, 밤이 되면 서로 간을 주고받은 부부가 회복을 위해 디귿자 복도를 걸었고 시간이 늦도록 나처럼 디귿의 허리춤에 있던 소파에 앉아 있는 환자들이 많았다. 분명 생각도 마음도 복잡했으리라.
병실은 넓었고, 내 침대는 창가였지만 누워있으면 늘 가슴이 갑갑하고 뜨거워서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자주 병실 밖 소파에 앉아서 강남의 야경을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다.
내 발 밑은 한 없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들 위에 서 있는 나는 지옥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도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세상은 스물다섯인 나를 내동댕이 쳤는데, 저마다의 불빛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겨워 웃고 있을까.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는 정말 (신장이 망가지면서 상승한 혈압 때문에) 고혈압성 망막박리가 와서 앞이 무척 뿌옇기도 했었지.
살고 싶지 않았다. 죽을까, 살까. 사실 죽으면 너무도 깔끔할 것 같았다. 스물다섯. 스물다섯의 나이에 죽으면 꽤나 아름답게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순수한 소녀의 얼굴로, 애틋하게 남을 수 있다. 구차하게 무거운 병을 안고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병실에서는 죽을 방법이 없었다.
병실은 12층.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면, 나는 보지 못하겠지만 아마 내 기사가 한 줄은 나겠지? 아니야. 병원 측이 대외적 이미지 손상을 우려해서 기사를 막을지도 모른다. 입원환자가 뛰어내렸다고 하면 병원 측 관리 소홀이라며 비난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머릿속에 별의별 생각이 다 스치다가 어느 순간 결심했다.
12층이니까, 분명 깔끔하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돌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낮 시간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결심했을 때 실행해야 한다. 병실도 조용하니 나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링거대를 꽈악 잡고 슬리퍼를 신고서 창가로 다가갔다. 스물다섯까지 그래도 용케 살았네. 그동안 고생 많았다. 결국 병든 채로 죽을 줄은 몰랐지만, 나쁜 짓 안 하고 지금까지 착하게 살았으니까 죽어서는 지옥에 안 갈지도 모르겠네?
손아귀에 힘을 주고 창문을 열었다. 겨울인데도, 햇살은 너무도 따뜻한 오후였다. 12층이니까 얼굴을 치는 바람만은 사나웠다. 꼭 정신 차리라는 듯이 바람이 내 얼굴을 날카롭게 때렸다. 창문은 반 밖에 열리지 않았다. (씨이발!!) 이 망할 새끼들!!! 그 순간 소리 내어 욕을 했다.
아무것도 아까울 게 없었다. 살아서 앞으로 좋을 일도 없었고,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아왔지만 삶은 대체로 나에게 불친절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창문 틈으로라도 어떻게 해볼까 싶었지만, 내 머리통이 그렇게 크지 않아도 저 창문으로는 나갈 방법이 없어 보였다.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단지, 창문이 열리지 않아서 나는 첫 번째 선택을 했다. 살아가기로.
살아가기로 결정을 했다면, 이제 어떤 방법으로 살아야 할지도 결정해야 한다. 이제 투석을 받을지, 이식을 받을지를 결정해야 했는데 사실 이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논외로 한다. 아무데서나 신장을 뚝 떼와서 붙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 당시 가족 세 사람 모두 약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나에게 신장을 주기에 부적합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 자체도 나에게는 부담이고 스트레스였다. 나는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죽음의 냄새를 쫓는 하이에나보다는, 마른 몸으로도 고고하고 탄력 있게 킬리만자로를 달리는 한 마리의 표범이고 싶었다. 온 진심을 다해서.비록 투석환자로서 살아가게 될 이후의 일상에는 다시없을 고고함과 탄력이었지만 말이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또 두 가지. 투석 방법에는 복막 투석과 혈액 투석이 있었다.
복막 투석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치료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대신에, 내가 의사가 되어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도록 공부해야 했다. 그리고 엄청 깨끗한 환경이 요구되었다.
혈액 투석은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기 때문에 사회생활에 제약이 있는 대신, 늘 병원에서 관리받기 때문에 비교적 심리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복막 투석을 하려면 복막에 도관을 삽입해야 하고, 늘 배에 1~2kg짜리 복대를 차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상상만 해도 덥고 무겁고 부담스러웠다. 늘 감염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도 했다.
엄마는 스물다섯 살짜리 배에 구멍을 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고, 나 역시도 절대 배에 구멍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그렇게 되면 통목욕은 불가능하다고 해서 더욱 꺼려졌다.
당시의 담당 교수님은 복막투석을 권유하며, 본인이 직접 도관을 삽입해주고 싶다고 수차례 유혹했지만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단호히 안된다고 말했다.
그 이후 관련 의학 프로그램을 보았다. 초기의 나는 모든 시청각 자료를 이용해서 투석 치료에 대해 알아가고자 했다. 복막과 혈액 사이에서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의학 프로였음에도 복막염으로 고통받거나 사망하는 사람들의 사례는 끊이질 않았고, 여러 기사를 통해 알아본 일본의 복막투석 사례는 더욱 처참했다.사망률이 너무 높았다.
그리고 올 9월, 실제로 복막투석을 5년간 하다가 한계에 봉착해 혈액투석으로 전환한 지 2년 가까이 되는 젊은 환자분을 만나고서야 나의 두 번째 선택이 얼마나 제대로 된 일이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많은 건강한 객관적 지표들을, 그녀는 이미 너무 많이 잃은 상태였다.
어쨌든, 나는 엄마가 단호하게 개입한 두 번째 선택 덕분에 살아가는 일을 택한 첫 번째 선택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단지 창문이 열리지 않아서 나는 스물여섯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었다. 서른 이후로도 뒤의 숫자는 계속 빠르게 바뀌고 있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투석 5년 안에 죽는다는 기사를 읽고서 당연히 서른 살이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눈만 꿈뻑이고 살았다.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늘 가슴 한편에 품고서.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살아있고, 의외로 건강하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신장병 외의 질환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고연령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나는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연민에 빠져있었다.
버티고 또 버텼다. 잘 살아왔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지만, 그 누가 묻든 지간에 잘 버텨왔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버티는 일이 때로는 생애 가장 능동적인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시간 속에서 알았다.
앞으로 또 수많은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겠지. 그 순간에는 선택에 대한 확신이 없을 수도 있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며 얼마나 잘한 선택인지에 대해 뚜렷하게 알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