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먹이는 위대한 일에 관하여.

나를 사랑하는 일.

by 이정연




14일은 오전부터 투석을 하고, 투석 이후에 투석 혈관을 손 보게 된다. 투석과 시술을 이어서 하기 때문에 점심은 또 건너뛰어야 한다. 제기랄.

배선실에서 식사 안내문을 보니, 점심은 늘 특식(일품식)이 나온다던데 나는 입원 내내 점심을 먹어본 적이 없다. 또 점심을 굶게 될 터이니, 오늘 아침은 든든하게 먹어야지. 그런 굳은 결심을 한 내게 주어진 14일의 아침식사는 최악이었다.



배추와 무가 들어간 맑은 국에 쌀밥, 돼지고기 채소 찜, 오이 볶음, 생선구이. 언제나처럼 간장종지, 디저트로 젤리 두 개.


국은 새콤한 맛이 났다. 참 이상한 것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국이다. 돼지고기 채소 찜은 큐브 모양의 돼지고기에서 비린내가 났다. 으윽. 처음에 겉모습만 보고 저염 오이지일 줄 알았던 저것은 물컹거리는 오이 볶음이었다. 식감도 물컹한 것이 맛도 없으니 총체적 난국. 반찬 반절씩과 생선 한 토막에 의지해 겨우 밥 반공기를 먹었다.

이제 이 상태로 투석 4시간을 버티고, 신장중재실에 들어가서 혈관을 손 보는 시술을 해야 한다. 시술할 때 왼팔의 혈관을 자세히 보기 위해 혈관에 조영제를 흘리기 때문에 이 식판을 치운 이후부터 필히 금식이다.


워낙 자주 받는 시술이다 보니, 아주 편안하게 왼팔에 마취를 하고 시술 내내 약물에 의지해 쿨쿨 잤다. 깨어나서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몽롱하고 지친 상태로 병동으로 올라와 나의 스윗홈에 안착하였다.

그래도 한 끼 굶는 정도야~ 생각했던 것은 나의 오만이었다는 것을, 침대에 앉아서야 깨달았다.


배가 고프다...!!!!!!




앞선 글에 말씀드렸듯 우리 병동의 환자들은 편의점을 이용할 수 없다. 우리 병실만 보자면, 이제 막 투석을 시작하게 된 환자들이어서 식사와 생수 외의 것을 섭취하면 야단을 맞더라. 물론 나 같은 10년 차 베테랑 환자는 야단맞을 일이 없다. 음하하하하하.


저녁식사 시간까지 네댓 시간이나 남았는데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신장중재실의 대빵인 K교수님은 내 혈관을 너무 자주 보셔서인지 시술을 1시간도 안돼 뚝딱 끝내셨다. 오후 시간이 엄청 많이 남았다. 오늘은 어디 또 검사받으러 갈 일도 없고, 하릴없이 주린 배를 부여잡고 있자니 이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궁리를 했다.


수면유도제가 혈관으로 들어가서 푹 잤고, 오늘은 아주아주 말끔하게 깨어났다.(지난번에는 웬일로 못 깨어나서 회복실에서 뽀로로 얘기하고 진상을 떨었다..)

나는 멀쩡하니까 혼자서 지하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지하의 보안요원에게 혹시라도 지하 진입을 제지당하면, 물러서면 그만이다! 나는 물러서기도 잘하니까. 나의 스윗홈은 병실 입구이자, 병동입구이므로 아주 날렵한 몸놀림으로 샤샤샥 빠져나왔다가 다시 되돌아오면 들킬 염려도 없(을같)다.


사물함을 열어 가방을 꺼냈다. 가방을 싹 비웠다. 카드만 딱 한 장 챙기고, 핸드폰을 들고, 좌우를 살피면서 병실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병동 입구로 샤샤샥.

두근두근. 엘리베이터를 탔다. 환자복에 쇼퍼백을 멘 나를 이상하게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히히히히. 지하 1층까지 내려왔는데 보안요원도 나를 제지하지 않아서 아무렇지 않게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편의점에서 리츠 크래커와(물론 치즈로. 크흑.) 크라운 산도 한 상자와 잘린 사과 한통을 샀다. 그리고 그걸 가지고 화장실로 갔다. 과자 상자를 뜯어서 내용물은 가방에 와르르 쏟아버리고, 상자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후훗. 완전범죄란 이런 것이겠지?


(좌)저기 편의점이 보인다앗! (우)어깨에 과자를 둘러메고 병동 앞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무사히 열네 개 층을 올랐다. 우리 병동 입구로 누군가 들어가기에, 복도에 간호사 선생님들이 없는가 살펴보고 그분의 뒤를 따라 샤샥, 병실로 들어와서 내 방의 커튼 속으로 쏙 들어와 버렸다.


크크크. 식사 때 나왔던 우유를 마시지 않고 냉장고에 두었었다. 그 우유에 빨대를 꽂고, 딸기 산도 두 봉지와 리츠 크래커 한 봉지를 펼쳐두고 먹기 시작한다. 세상에, 꿀맛! 위장이 차오르니 살 것 같다. 산도를 먹고 있는데 "이정연 님~" 하더니 간호사 선생님이 나타났다. 커튼을 열고는 내가 과자 먹는 모습에 놀란다. 내가 아까 배고프다고 어필을 했었거든. 근데 아무것도 없으니 물 마시며 버티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런데 내가 과자를 먹고 있으니 얼마나 놀랐겠어?

"가방을 뒤져보니 이게 있더라고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미안해요..)

"와, 잘됐네요. 뭐 드릴 수 있는 것도 없고 걱정했는데. 얼른 드세요~"



달달한 과자만 먹었으면 배가 더 고팠을 텐데 우유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나를 배불리 먹이고, 쓰고 있던 글을 마저 써서 발행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숨을 돌리며, 5시에는 나를 씻겨줘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5시가 되자마자 칼같이 일어나서 샤워실을 향해 갔다.(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여사님들께 인사도 잘 드리며 중요한 곳의 위치와 사용 팁들을 파악해두었다.)



찾기 어려운 구석에 샤워실이 있다. 바늘을 꽂고 있는 데다 당장 몇 시간 전에 시술을 받았기에 샤워는 안될 것 같아서, 깔끔하게 머리만 감기로 한다.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머리를 둘둘 만 다음, 스윗홈으로 돌아와 멍 때리고 있는데 또 커튼이 열린다. 그러더니 간호사 선생님이 "이정연 님 머리 안 말리면 감기 걸려요~"하며 드라이기를 빌려주셨다. 욕실에 같이 들어가서 콘센트에 드라이기를 연결해주시기까지 했다.

깔끔하게 머리를 말렸다. 내 커튼을 열었던 이유가 무엇이셨는가 여쭈니, 이정연 님 잘 있는가 걱정되어서 들여다봤어요, 라는 답이 돌아왔다. 오늘 수면유도제가 들어갔어서인가 날 너무 아기 취급하시는데? 왠지 기쁘다. 헤헤헤.


깨끗하게 씻은 맑은 기분으로, 이제 저녁식사를 기다리자!



7월 14일의 저녁식사는 최고였다. 최악과 최고가 같은 날이라니. 어쩌면 인생도 이런 건지 모르겠다. 최악이라고 생각하고 기분이 쳐져 있는데, 바로 다음 순간에 최고의 일이 찾아올 수도 있는 거지! 그러니까 최악의 상황을 만났다고 해서 마냥 실망하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저 평온한 마음으로 감내하고 버티면 이렇게 다음 순간 맛있는 밥을 먹을 수도 있는 거야!


간이 안되어있지만 아삭아삭한 식감이 너무 좋았던 청경채 나물, 약하게나마 적절한 간이 베어 담백하고 맛있었던 채소 닭찜, 가시가 하나도 없이 부드럽고 고소했던 동태전. 맑은 콩나물국과 쌀밥. 후르츠 칵테일이 또 나왔다.


정말 맛있어서 혼자 신나서 고개를 까딱 거리며, 룰루 하는 마음으로 모두 싸악 비웠다. 투석환자의 기본, 국은 건더기 위주로 조금만.



게다가 오늘의 후르츠 칵테일은 지난번보다 행운적인 면에서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체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타드 코코가 엄청 많이 들어있었거든. (저 투명한 우무묵같은 몰랑이가 나타드 코코다.) 난 어릴 때부터 코코를 제일 좋아했다. 그래서 마지막 한 입은 나타드 코코 잔뜩과 체리로 장식했다. 온 입 안이 탱글탱글. 나는 대체로, 맛있는 걸 아껴두었다가 마지막에 먹는다.

그래서 어쩌면 내 인생도, 맛있는 것들은 조금 더 나중에 잔뜩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늘 생각한다.


지금의 불행이, 영원히 지속될 없다. 분명하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나는 오롯이 혼자이므로 내가 나를 먹이는 일, 씻기는 일 같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일들을 소홀히 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나의 유일한 보호자니까. 나를 잘 돌보아 주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