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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Nov 25. 2022

어쩌면 막장드라마, 혹은 가족드라마


요즘 마음이 복잡하다.


사실 우리의 성장과정 내내 엄마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집에 친구들을 언제  데려와도 간식을 푸짐하게 내주며 대접해주었고, 맛있는 밥을 해주거나 특별식을 사주는 일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친구들은 누구나 우리 집에 오는 것을 좋아하고 또 나의 다정한 엄마, 따스한 우리 집을 부러워했다.

 

엄마는 내가 열두 살이 되도록 산타를 믿을 수 있게끔 완벽한 연기를 해주었고, 늘 내 욕망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크리스마스 선물들을 해주었다. 예를 들어 미미의 집 같은 것.(나는 고학년까지 미미 빠였다.)

내가 반장이 되면 다음에는 제발 반장선거에 좀 나가지마라 하면서도 혹여나 학교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싶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를 해주었고, 나는 매년 엄마 그 마음을 이용했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그때의 나는 권력욕에 반쯤 미친 어린이였고 청소년이었다. 엄마는 미미의 집을 사주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나의 권력욕 채우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 부응해준 것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행복해 보이는 리에게도 사정 있었다. 엄마는 다정하고 좋은 엄마였지만, 늘 지나치게 섬세한 나와 부딪혔다. 꼬집어 말할 수 없게, 때로 꼬집어 말할 수 있을 만큼의 무신경함이 나를 힘들게 했다.  비밀일기나 감성이 담뿍 담긴 글도 훔쳐 읽고 칭찬하곤 했다. 심지어 손톱만한 장난감 자물쇠가 달린 것도 열어서 말이지. 맙소사.


그리고 엄마는 무척이나 강했지만, 달리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던 탓인지 어린이였던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어머니(시어머니 용심은 하늘이 내린다 하였다!)는 갓 시집온 새색시인 엄마에게 김장 150포기를 혼자 하라 했다. 그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어, 똑똑한 어린이로 자라나기까지 계속되었다. 게다가 용심 충만한 시어머니와 기센 큰 동서, 못돼 쳐 먹은 아랫 동서까지 합심해 셋이서 엄마 하나를 아주 못살게 굴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늘 엄마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어렸던 나는 연약한 엄마를 지키기 위해 어른들에게도 기꺼이 맞설 각오를 가슴에 칼처럼 품고 살았다. 똑똑한 네가 어느 때고 나서서 엄마를 지켜줘야 한다고 강요했던 (지금은 절연한) 이모의 입김도 꽤나 크게 작용했다. 덕분에 나는 나중에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할머니에게까지 맞서는, 정말로 대가 센 계집애가 되어 버렸다.




엄마는 다정하고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지만, 를 아이답게 살게 해 주지는 못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엄마에게 가를 졸라본 일이 없었고, 초등학교 입학식 이후 첫 등교에 "앞으로는 이 길을 외워서 혼자 다녀야 해."라고 엄마가 말하기에 입술을 꼭 깨물고 혼자  그 길을 외워 다녔다. 동생이 여덟 살이 되어 입학했을 때, 손을 잡고 함께 등교할 누나가 있다는 사실이 참 부러웠다.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던 그 길이 어린 마음에도 쓸쓸했나 보다. 엄마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혼자 하게 내버려 두었다. 밥숟갈을 들고 쫓아다니는 일도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랬던 엄마가 지금은 아이처럼 군다. 본인은 내 손목이 부러졌을 때도 혼자 머리를 감게 내버려 두고서. 어릴 때부터 나는 독립적인 어린이로 성장하느라, 엄마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굳게 먹느라 무척 힘들었는데 말이다. 자라면서 때때로 벽에 부딪혔던 힘든 순간에도, 나만이라도 엄마를 힘들게 하지 말자는 생각에 혼자 헤쳐 나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요즘의 엄마는 잠이 부족한 내 머리맡에 새벽 세시에도 찾아오고, 새벽 다섯 시에도 찾아온다. 그리고 속상하다는 얘기를 한다. 늘 당장부터 출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울먹이는 소리를 하고, 사표를 쓰겠다 하기에 내 나름대로 다정하게 그만둬도 된다고 편을 들어주어도 또 저녁이 되면 참고 더 다녀보겠다고 말을 바꾼다. 어쨌든 엄마 가장이라는 책임감에 짓눌려, 또 한편으로는 자존심 때문에 그러는 것을 알면서도 속이 터진다.


집에 혼자 있기가 싫다고 하고, 세상을 잃은 듯 우울한 얼굴을 하고 멍하니 앉아있기도 한다. 대학병원 외래도 혼자는 못 가겠다고 해서 나는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도 엄마와 전철을 갈아타고 서울을 거쳐 부천까지 오가고 있다. 자 전철 타는 걸 무서워한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해서 전철을 타야 할 만큼 먼 곳은 늘 내가 동행하지만 요즘은 어리광의 정도가 조금 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 당황스럽다.


가족을 기꺼이 보듬고 짊어지는 따스한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스스로의 바닥을 본 것 같다. 내 몸도 너무 아프고 힘든데, 나도 보통 병이 아닌데 엄마를 모두 받아주기가 너무 버겁고 성가신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애쓰고, 또 애썼다. 내가 스스로의 바닥을 볼 것만 같으면 생각하기를 딱 멈추어버렸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수요일에는 원래 엄마가 회사사람들과 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날이었다. 마의 신변에 변화가 생기면서 여행도 취소되었다. 엄마 마음이 울적하겠지 싶어서, 가까운 어디라도 모시고 가야지 했다.

"엄마 임진각에 곤돌라 타러 갈까요?"

우리 가족 중에 엄마만 곤돌라를 아직 타 보지 못했다. 그래서 투석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아주 힘들고 피로한데도, 아주 조금 쉬었다가 박카스 한 병을 까 마시고 길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임진각에 가서 곤돌라를 탔다. 밭과 강을 건너 민통선으로 향했다. 아주 가파른 언덕을 올라, 전망대에 갔다. 두 시간 전까지 바늘을 꽂고 누워있던 몸이라 그런지 골반까지 아플 정도로 힘들었지만, 비싼 돈 내고 곤돌라 크리스털(투명한 바닥을 통해 몇십 미터 아래를 볼 수 있다) 티켓을 끊어 민통선까지 넘어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투석한 날 내가 여기까지 왔다며 생색을 내면서(더러운 생색쟁이) 전망대까지 올라 엄마를 평화정에 세워놓고, 평화의 등대에도 넣어놓고 사진을 찍어드렸다. 엄마의 눈이 아이처럼 빛났다. 전망대에서 맞는 바람은 시원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것이 기분이 제법 좋아졌다.


민통선 안에 있어서 비싸겠지 싶어서 쳐다도 보지 않았던, 곤돌라 탑승장에 있는 카페에도 엄마 손을 끌고 들어갔다. 각자 아이스커피 한 잔씩과 빵 두 개를 주문해서 마주 앉았다. 커피는 보통 카페의 가격이었고 빵도 대단히 비싸지는 않았지만, 평소의 나라면 빵 하나에 그 돈을 쓰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무조건 엄마의 기분을 풀어주야 한다. 요즘의 내 사명이다.

엄마가 빵도 잘 드시고, '아메리카노는 이래야지'하며 커피도 썩 마음에 들어 하신다. 엄마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눈다. 나치게 착하게만 살아서, 엄마의 회사생활 내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겼지 싶어서 내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마주 앉은 엄마의 손을 꼭 잡으며.


올 때는 택시를 타고 왔지만, 귀가할 때는 전철을 타기로 했다. 그렇다 보니 5시 15분에 임진강역을 떠나는 문산행 전철 시간에 늦을까, 우리는 또 강을 건너 평화누리 공원을 눈으로만 스윽 훑고 임진강역을 향해 함께 걷는다.


사실 이곳은 2012년 내가 아프고 나서,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가족끼리 소풍을 왔던 곳이다. 그때는 바람개비 언덕도, 곤돌라도 없던 때지만 내가 타고 싶다고 해서 우리는 평화누리열차도 타고 임진각 일대를 쭉 돌고, 지금의 평화누리공원 잔디밭에 돗자리를 크게 깔아 두고 엄마가 이른 아침에 싼 도시락을 함께 먹었었다. 사느라 바빠 어디 놀러 한 번 가보지 못하고 병을 얻은 내가 안쓰러워 마의 휴무날 우리는 기차를 타고 여기를 왔었지. 그때는 파주에 전철이 개통되기 전이다. 그 기차에서 엄마가 찍어주었던 봄의 단발머리 소녀를 기억한다. 우리는 걷는 동안 10년 전의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다.


엄마 마음을 보듬으며 생각다. 내가 이 병을 얻고 난 뒤, 아프다고 성질을 있는 대로 부릴 때 다 받아주었던 엄마를. 그러나 엄마도 이제는 늙어서 그때처럼은 해줄 수가 없어서, 말로는 하지 않지만 늘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척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너무 행복해서 오늘부터 일기를 쓰고 싶다는 엄마를 동네 마트에 모시고 가서 노트를 사드렸다. 엄마는 밤에 일기를 마구 쓰더니, 우리에게 읽어보라고 건네주었다. ""딸이 임진각에 곤돌라를 타러 가자고 했다. 정연이가 빨리 왔으면... 하고 병원에 간 딸을 기다렸다."

일기 속 그 문장을 읽고 울컥했다.

나이가 들면 아이가 된다더니, 내가 평생을 봐 왔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다. 나 자신을 감당하기도 벅찬 내게 의지하는 엄마가 버겁다고 느끼는 스스로가 막장드라마처럼도 느껴진다. 그러나 나를 온전히 책임지며 길러준 그 옛날의 엄마, 나를 상식적이고 제대로 된 어른으로 길러 준 엄마. 내가 좋아하는 내 자신의 모든 면들은, 나 혼자 자라나서 된 것이 아님을 또 잊고 말았다. 또 저 혼자 큰 줄 알고 말이지.


엄마의 검사 결과는 전에 비해 좋지 않다. 전에 없던 이상도 발견되어, 담당 교수님도 엄마에게 목소리를 높이며 걱정의 말을 했다고 한다. 엄마는 또 마음을 동동 구르며 불안해한다. 그런 엄마를 안심시키는 것은 내 몫이다. 그리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많은 일들을 함께 한다. 어쩔 수 없이 내 마음에 있는 막장드라마를 지워야 한다. 엄마를 귀찮아하는 마음, 성가시게 느끼는 마음. 그리고 12월의 첫 번째 날 하는 검사에서, 분명 우리는 마음의 걱정을 모두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애쓰는 대로 가족드라마를 계속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를 길러내고, 이제는 늙어버린 엄마를 위해서.




표지사진; 이정연, 임진각 곤돌라를 바라보며, 20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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