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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May 20. 2020

네이버에서 브런치를 검색하다.

시작해볼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이성으로가 아닌 인간으로 담백하게 좋아하고 있다. 시를 전공한 친구여서, 처음 친구를 알게 계기가 친구가 쓴 글이어서 나는 그를 누구 씨라고 소리 나게 부르고 속으로는 조 작가님 이렇게 부르며 살아간다.

그 친구가 브런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 내가 보아온 브런치 글들을 보건대 나는 결코 발을 들일 수 없는 세계라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감히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 쯤 되는 듯했다.


어버이 날이었다.

우습게도 나는 어버이 날 제일 친한 친구 JJ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야단을 맞고 있었다. 동년배 사이에 야단을 맞는다니 우스운 말이지만. 나는 정말로 철이 없고 관심이 필요한 관심종자라서 십 대 때에 그 친구를 엄마라고 불렀었더랬다.-물론 지금은 친구에게 진짜 자식이 생겨버려서, 내 나이가 나이니만큼 그런 미친 호칭은 쓰지 않는다.- 그 이후 20년 가까이 이어져 온 관계에서 나는 친구에게 너무 많은 것을 들켜 버렸다.

친구는 나를 아파했다. 늘 나를 야단쳤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이유는, 그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 마음을 알면서도 나는 근본적으로 고쳐지지 않아서 그래서 지금 더 슬프다.


나에게는 아주 좋은 핑계가 있다. 만 25세를 넘기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ESRD 판정을 받았다. 사실 이렇게 쓰면 사람들이 대번 알지 못하기에 난 내가 가진 희귀 난치병을 저런 식으로 먼저 던지고 본다.

당신이 대번 알지 못할 정도로 내가 흔치 않은 병이라고, 중한 병이라고. 나는 그렇게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은 늘 자기 손의 거스러미가 가장 아픈 법이니까. 사실은 겨우(?) 투석환자 일 뿐인데 말이다.

어쨌든 아프다는 사실은, 그 병이 심지어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 병이라면 무척 큰 무기가 되어준다. 다름 아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족과 친구들. 아프다는 이유로 그들은 나를 참아주고, 나를 봐주고 무한히 기다려준다. 조금 불리해지면 나는 또 아프다는 핑계를 댄다. 그렇게 나는 도망쳐 왔다.


친구에게 야단을 맞았던 이유도 그것이다. 무려 어버이 날에.

그 날은 잠깐 소나기가 내렸다. 내 방 베란다에서 내려다본 도로의 지면이 촉촉해서 나는 문득 친구가 보고 싶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결국 화제는 나의 무기력으로 흘렀고 나는 그 무기력에 내 병이라는 핑계를 버무려 변명하기 급급했다. 친구의 말투가 공격적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날 울었다.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친구는 말했다. 네가 아픈 건 네 생각대로 너의 정말 큰 약점이 맞다고.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 사실 그 약점을 상쇄시킬만한 장점은 갖고 있지 못한 상태라고. 너는 지금 네가 해야 하는 공부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너는 그 해야 되는 것조차 하지 않는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 이쯤에서 모든 걸 접고 진정으로 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아예 다른 길로 나아가길 바란다.


말했듯, 어버이 날이었다. 친구에게는 다섯 살짜리 예쁜 아들이 있다. 태어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작은 바위 같은 아들도 있다. 분명 친구에게는 특별한 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키운다는 일은 매우 지치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친구는 멀리 있는 나를 한 시간이나 야단쳐야 했다. 이 무슨 끔찍한 일인가. 심지어 우리 엄마는 내가 방에서 친구와 얘기하다가 우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내가 물질적으로 한 선물의 기쁨 같은 것은 그 순간 싹 날아갔을 것이다.


그 길로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해 보기로 JJ와 약속했다.

사실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실행에 옮기지만 못할 뿐 죽는 것이다.

내가 죽어버리면 나도 나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가족과 친구들도 나를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가장 쉬운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미 자살기도는 실패로 돌아간 일이 있기 때문에. 자살기도자에게 응급실의 몇몇은 굉장히 차갑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죽을 용기도 없는 비겁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죽지 않는다. 희귀 난치병이어도 나는 그럭저럭 살아 있기에 딱히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은 늘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십 대때까지는 내가 특별하다고 느꼈고, 그럭저럭 주변 환경도 행운도 따라줬다. 그러나 불행에 빠진 이후 나는 점점 더 늪에 빠져들었다. 불행이 시작되니 이건 내 불행에 무한 동력원이 달린 것처럼 끊임없이 불행해졌다. 물론 그중에 행복한 장면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내 병 때문에 결국 내 인생이라는 한 편이 통째로 불행으로 물든 기분이다. 그렇게 우겨본다, 이 순간은. 나는 도망치는 비겁자이니까.


우습게도 이 비겁자에게 단 한 가지 특출 난 능력이 있다면, 그건 글쓰기. 브런치를 보면 세상에 미친 필력을 가진 작가님들이 저렇게 많은데, 내 주위에서는 내가 글을 제일 잘 쓴다. 아, 내 친구 조 작가님 빼구요. 어쨌든 무엇이든 써야 할 일이 있을 때 친구들은 나를 찾는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친구 S씨는 졸업작품에 갖다 붙일 글을 나에게 부탁했고, 가장 친한 친구 E는 나에게 남자 친구 어머니께 드릴 글을 부탁했었다. 그 외에는... 밝히기 부끄러울 정도로 사적이거나 공적인 대필 청탁을 많이 받았다. 내 글의 일부는 어느 기관 대표님의 사무실에 있을 것... 이므로 여기까지만 밝히기로 한다. 이건 내 특유의 진실된 농담이니 웃어도 좋다. 사실 웃어주셔야 한다.


그래서 늘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인생의 모든 순간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글을 쓰지 않고 지난 몇 년 간 방황해 왔다. 사실 아팠던 그 순간부터 내 글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친구가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보라고 한 그다음 날, 쓰는 일이 떠올랐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 내가 꿈꾸었던 모든 일들은 사실 내가 글을 쓰기 위해 뒷받침이 되어 줄 일들이었다. 나는 스스로 글을 잘 쓴다고 생각했지만, 절대로 이 글로 돈을 벌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심지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의식의 흐름대로 뱉어낼 뿐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일은 여전히 좋다. 가장 행복하고 떳떳한 일이다. 글 하나를 욕으로 다 채운다고 해도 나는 그것이 내가 쓴 글이라면 떳떳하게 내보일 수 있다. 누구에게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친한 친구 E에게만 "나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어"라고 말했다. 나를 작가님이라고 불러주는 친구다. 본인 블로그에도 내 글을 게재하고 본인이 좋아하는 작가라고 소개했다. 내가 얼마나 무기력한 인간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을테지만, 늘 변하고자 하는 나의 열망만은 진지하게 보아주는 사람. 늘 응원해주는 사람. 그래서 브런치 얘기를 꺼낸 이후 독촉을 받고 있다. 작가 신청은 대체 언제 하는 것이냐고. 나는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고 친구를 달래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때로 이렇게 소용없는 사람을, 나는 매우 좋아한다.


브런치를 하겠다고 결심한 이후, 나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앞으로의 모든 글은 나를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는 일이 될 것이기에 사실 글을 시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이 일을 스누피가 가능하게 해 주었다. 지난 주말 스누피 커피우유의 효능을 맛보려고 사다 놓았는데 8시간 전쯤 반 컵 마셨지 뭐예요. 그랬더니 잠이 안 오잖아. 더 이상 누워 있는 것이 의미가 없겠다 싶어 책상 앞에 앉았다. 크롬 창을 띄우고 네이버에서 '브런치'를 검색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이다. 아직은 나도, 당신도 알 수 없는 그 모든 것의 시작. 바로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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