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과 몸통 박치기하는 자세’

미스에스 - 이 나이 먹고 뭐했길래

by 예슬

많은 음악을 자주 듣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 번 귓가에 맴돌아버린 음악은 계속해서 찾아 듣는 경향이 있어요.


제 플레이리스트에는 오래도록 머물러있는 음악들이 있네요.


제가 그냥 흘려보내는 순간들을 대신, 기억해주는.

그래서 음악을 들으면, 다시 그 순간을 찾아내 주는.


시간이 되어 함께 흘러가버린 순간들을 기록하고 회고하며

당신의 순간도 꺼내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고자 합니다.




밖이 참 춥다. 요즘 나의 출근 장소는 명동 예술극장이다. 연말 분위기가 가득한 명동의 곳곳을 지나 극장에 도착했다. 나에게 이 극장이 가지고 있는 의미만큼 무게감이 느껴지는 나무문은, 살짝 밀어서는 잘 열리지 않는다. 손잡이에 손이 닿는 것도 추워 내가 찾은 방법은 극장 문에 몸통 박치기하는 것이다. 박치는 힘만큼, 작용 반작용의 법칙으로 문도 잘 열린다. 따뜻한 온도에 한참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고개를 좌우로 풀어낸다. 집에서 극장까지 지하철을 탔기에 바깥공기 속에 존재한 것은 이십 분도 안 될 것 같은데, 벌써 코에 파운데이션이 지워진 빨간 루돌프가 분장실 거울에 비친다. 루돌프가 떠오르는 걸 보니 이젠 진짜 연말이다. 매해 겨울 분위기를 깨방정 떨며 좋아했던 난데, 서른을 코앞에 뒀다고 생각하니 들이마신 숨이라도 잠시나마 내 몸에서 내보내고 싶지 않은 오기가 생긴다. 이렇게라도 시간을 붙잡고 싶어 졌다. ‘이 나이 먹고 뭐 했을까?’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는데,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내 오랜 18번 노래가 떠올랐다.


미스에스의 ‘이 나이 먹고 뭐했길래’.

21살의 애창곡이라기엔 아이러니한 제목과 가사를 가지고 있지만, 8년 전 나에겐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덩달아 떠오르는 노래에 얽힌 에피소드들이 내 입꼬리를 올린다. 엔돌핀의 물꼬가 터졌다. 동아리 무전여행에서 히치-하이킹으로 교사 연수 관광버스를 얻어 탄 적이 있었다. 편하게 산길을 내려가게 된 우리는 선생님들의 흥을 돋워드리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각자 18번을 열심히 부르며 분위기를 띄웠고, 어느덧 내 차례가 되었다. ‘이 나이 먹고 뭐했길래 / 사랑도 해봤으면서 아팠으면서 변한 게 없어 난’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에 두 눈 꼭 감고 열창했는데, 눈을 떠보니 삼촌과 아빠뻘로 보이는 선생님들의 표정이 ‘뜨악’이었다. 자신들보다 10살은 어린 친구가 그런 가사의 노래를 불렀으니... 지금 생각해도 웃긴 이 에피소드는 한동안 술자리 안주로 우려 졌다.


재수를 해 대학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아 그 노래가 끌렸던 건지, 아니면 연기 연습을 하기에 감정 발산이 잘 되는 가사가 좋았던 건지, 그 노래가 애창곡이 돼 버린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당시에 겪어보지 않았던 농도 짙은 사랑의 감정을 상상하고, 머지않을 미래에 하게 될 행복한 연애를 꿈꾸며 불렀던 것 같다. 지금보다 뜨거웠던 시절, 오래 방을 갈 때마다 오프닝 혹은 엔딩으로 그 곡을 정말 열심히 불렀다. 그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은 ‘이 나이 먹고 뭐했길래’를 박예슬의 노래로 기억할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내가 진한 사랑을 두어 번쯤 하고, ‘후회하고 눈물 흘리고 / 아직도 이 나이 먹고 이것밖에 안 돼 / 그렇게 겪어봤으면서 맘처럼 잘 안 돼.’라는 가사가 현실로 닥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노래는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빼도 박도 못 하는 이십 대 후반이 된 것이 작년이었던가? 오랜만에 동아리 친구들과 공연을 보고 노래방에 갔다. 12시쯤 귀가해야만, 내일을 맞이할 수 있었던 우리는 그날만큼은 내일이 없이 놀았다. 온갖 추억 속 함께 부르던 노래를 화면에 띄우고 다음 날 만나게 될 어깨, 허리, 무릎의 삼단 콤보 통증은 생각도 안 한 채 관절이 나가라 뛰었다. 서로의 애창곡을 소환하고 영혼을 탈탈 털어내던 찰나, 가슴을 뛰게 하는 전주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불러보는 가사와 멜로디. 20대의 기억들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나의 8년 전, 머리로 이해하던 가사들이 가슴속에 콕콕 박혔다. 그동안 그 자리에 멈춰서 나이만 먹어버린 게 아니었다. 꿈꿨던 미래는 과거가 되어 나의 시간으로 거듭났다. 촘촘하게 채워진 과거가 다시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현재의 나를 다독여주었다.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긴 좀 부끄럽지만, 그날 그 곡을 꽤 잘 불렀던 것 같다. 우린 이제 이 노래가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다며 진하게 서로의 뜨거웠던 시간을 공유했다.



한 달만 지나면 서른이다. 기대 가득했던 스물을 기다리던 것과 다르게, 두렵다. 그 뒤로 펼쳐질 일 년, 일 년이 걱정되며 숫자가 말하는 책임감의 무게가 가슴으로 들어온다. 기분에 따라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모르겠다는 한탄을 하다가도 웃음이 나와 에라 모르겠다며 생각을 접는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서른 또한 나를 구석구석 채워 명동 예술극장의 무거운 문을 잘 열 힘을 만들어 줄 것이다. 서른. 무섭고도 기대되는 녀석이다. 오늘은 집에 가는 길에, 오래 방에 들러서 ‘이 나이 먹고 뭐했길래’를 또 불러야겠다. 왠지 이 노래는 지금부터 물이 오를 것 같다.




'서른과 몸통박치기 하는 자세'는 스토리지 북앤필름 wirte and make 워크숍 5기의 결과물 <음악이 찾아낸 순간들>에 수록되어 있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