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예신 Sep 01. 2024

엔화가 안전자산이라 불리는 이유

Why Japanese yen is safe haven currency

엔화 흔히 안전자산이라 불다. 경제 위기감이 엄습하면 엔화의 가치가 으레 강세(엔고)가 되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에서 왼쪽 원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엔화가 강세가 된 모습이고, 오른쪽 원은 2007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엔화가 강세가 된 모습이다.

달러엔 환율 추이. 최근 엔화는 약세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일본 경기 침체 역사에 대해 대략 아시는 분이라면 엔화의 강세에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일본은 80년대 말 부동산 버블 폭락 이후 30여 년 이상 경기 침체를 겪었고, 각 정권들은 경기 회복을 위해 양적완화, 저금리 정책 등을 펼치며 엔화를 시중에 엄청나게 풀어버으니까.


은행과 정부가 장기간에 걸쳐 엄청나게 풀어버렸다면, 엔화의 가치는 진작에 휴짓조각 수준으로 추락했어야 했다. 마치 아르헨티나 페소처럼 말이다(아래 차트 참고).

달러 페소 환율 추이

그런데 경제 위기 속에서 엔화 매수 수요가 증가하며 강세가 되어버리는 현상은 세계적으로도 정말 특이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최근에도 마찬가지다. 지난 7월부터 엔화는 급격히 강세로 전환되었다. 최근 달러엔 환율의 하락 추세를 보면 놀라울 정도다. 일본은행이 금리를 인상했다곤 하나 정말 찔끔 올린 수준이다.


도대체 엔화 가치는 경제 위기 속에서 강세가 되는 걸까? 사람들은 엔화를 안전자산으로 여기는 걸까? 향후 글로벌 경제 위기가 도래한다면 엔화나 엔화 관련 금융 상품에 투자하는 것은 해볼 만한 시도일까?



1. 엔화, 언뜻 생각하면 안전자산일 이유가 전혀 없다.


일본은 1980년대 말 부동산 버블 붕괴 이후 30년간 찾아온 경기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엔저 정책을 적극적으로 고수해왔다. 시중에 엔화를 가득 풀어서 소비와 투자를 촉진함으로써 경기를 부양하기 위한 시도였다.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엔화가치가 상승하며 경기침체 우려가 발생하자, 당시 고이즈미 내각은 2000년대 초반부터 1차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엔화를 적극적으로 시장에 풀어 엔저를 유도하여 일본 경제에 숨통을 틔웠다.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다시 엔고가 이뤄지자 당시 아베 정권은 2차 양적완화와 엔저 유도 정책을 단행했다. 2012년부터는 소위 '아베노믹스'를 시작했다. 이 정책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일본은행의 제로금리와 무제한 양적 완화 정책

2) 공공 사업 확대를 위한 재정지출 확대

3) 기업 친화 정책, 여성 경제 참여 촉진


이를 위해 아베 정권은 막대한 국채를 발행했고, 이는 고스란히 일본 정부의 국가 부채 증가로 이어졌다. 아래 그래프는 일본의 GDP 대비 국가 부채의 비율이다. 2022년 기준 일본 국가 부채는 GDP 대비 216%이다.

일본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 추이


일본은 막대한 국채를 발행해 조달한 돈을 다양한 명목으로 시장에 공급했고, 그 결과 엔화 가치는 굉장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최근 5년 동안은 엔화의 약세가 특히 심했다. 달러 엔 환율이 급등하면서 엔화 가치가 그야 말로 떡락하고 만 것이다.


최근 5년간 달러엔 환율 추이

그간 엔화의 가치 절하 문제가 하도 심각하다 보니 아래와 같은 기사도 많이 나왔다. 엔저가 되면 수출 기업은 실적 호조를 누려도, 일본 내 수입 물가는 오르기 때문에 평범한 일본 서민들은 삶이 고달파지게 된다. 물론 이 기사는 일본에 대한 편향적인 시선이 일부 담겨 있을 수 있다.



2. 그럼에도 엔화 가치가 안전자산의 지위를 유지하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화 가치가 아르헨티나 페소처럼 완전히 나락으로 가지 않는 이유가 있다. 크게 3가지다.


첫째, 일본이 발행한 국채의 95%는 엔화 표시 국채여서 대외적 불안 요소가 적다.


엔화 표시 국채란 엔화로 액면가와 이자가 명시된 국채다. 일본은행, 일본 금융기관, 일본 은퇴 세대가 엔화 표시 국채를 주로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장기 투자용으로 엔화 표시 국채를 보유한다. 근데 이 엔화 표시 국채는 외국인 투자자에게 그닥 매력적이지 않다. 엔화 표시 국채의 이자율에 영향을 미치는 일본은행 기준금리가 너무 낮기 때문이다.


20년물 일본 전쟁채권(엔화 표시 국채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이며, 본 글과는 관련성이 적음)

그래서 엔화 표시 국채는 일본 내에서만 대부분 소화될뿐, 외국인 투자자가 투자할 유인이 적다. 따라서 외국인 투자자가 대규모로 엔화 표시 채권을 매도를 한다든가 하는 위험사실상 없다. 따라서 엔화 표시 국채는 가격 변동성이 적기 때문에, 일본 자국민들은 엔화 표시 국채의 가격 변동성을 우려할 필요 없이 안정적으로 투자할 수 있다.


그리고 통화량 측면에서 보면, 엔화로 국채를 매입하려는 꾸준한 수요시중의 엔화 유동성을 줄이는 데 일부 기여하므로 엔화 가치도 일정 수준으로 유지될 수 있다.

일본은행 기준금리 추이


둘째, 경제 불안기에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가속화되기 때문이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저금리 사회다. 그래서 적극적인 자산 증식을 원하는 투자자들은 평소 엔화를 저금리로 빌려, 고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해외 자산에 많이 투자한다. 이를 엔캐리 트레이드라고 한다. 예컨대 일본에서 1% 금리로 엔화를 대출한 다음 5% 이자를 주는 미국채에 투자하면 이론적으로 4%의 차익을 얻을 수 있다.


엔캐리 트레이드의 구조(출처: 비즈워치)

그런데 글로벌/지정학적 불안이나 일본 금리인상-미국 금리인하 등의 이벤트가 발생하면 소위 '엔캐리트레이드 청산'이 이뤄진다. 쉽게 말해 해외 자산 팔아서 달러를 확보한 다음, 그걸로 엔화로 환전하여 대출 원리금를 갚아버리는 현상이 발생하는 거. 이로 인해 엔화 강세가 나타날 수 있다.


셋째, 일본은 세계 최대 대외 순자산 국가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대외 순자산국이라 불린다. 엔저를 통해 축적한 자본을 해외에 꾸준히 투자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에 따르면 최근 일본 재무성이 집계한 대외 순자산 평가액은 약 471조 엔(한화 약 4,085조 원)이다.

경제 불안이 발생하면 일본 투자자 입장에선 해외 자산을 매각하고 외국 통화를 엔화로 환전할 유인이 생긴다. 혹은 지난 7월 말처럼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려버린 탓에, 저금리로 엔화를 대출한 투자자들이 이자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해외 자산을 매각하고, 달러로 엔화를 사들일 수도 있다.


이밖에도 연준의 기준금리 인하로 인한 달러 약세-엔화 강세로 환차손이 예상될 경우 이를 회피하기 위해 해외 자산을 매각할 수도 있다. 앞서 설명한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과 비슷한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이다.


3. 결론


최근 금융시장은 참 복잡하다. 시장과 화폐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벤트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 이벤트들이 초래할 후속 상황을 생각나는대로 몇 가지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연준 금리 인하 시: 약달러, 주가 하락, 금값 상승, 장기 국채 가격 상승

2) 트럼프 재당선: 약달러 정책, 부채 증가, 인플레 재점화, 고립주의 고수, 방위비 분담금 인상

3) 일본은행 금리 지속 인상: 엔캐리트레이드 청산 증가, 엔화 강세, 일본 증시 하락

4) 엔캐리트레이드 청산: 미국채 가격 하락, 엔화 강세


솔직히 올해 말에 증시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 지금으로선 예측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다만 필자의 좁은 식견으론 엔화는 강세를 유지하고, 미국 장기국채 가격은 큰 폭으로 오를 것 같다. 엔고, 미국채 상승 시대에 어떻게 투자해야 할지는 조만간 적어보겠다(2621T 같은 걸 고민해볼만 하다).


아래 블로그와 유튜브에서도 금융 시장에 관한 재밌는 콘텐츠를 보실 수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