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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 Dec 14. 2022

신입 마케터가 맞춤법에 집착하게 된 사연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이라면,

교육업계에 마케터로 입사해 1년이 지났을 즘, 좋은 기회로 자사에서 판매하는 강의와 교재의 상세페이지 기획 업무를 맡게 됐다.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었던 자사 홈페이지를 그제야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메뉴, 모든 배너를 클릭하며 홈페이지 이곳저곳을 구석구석 살폈다. 스크롤을 내리면 내릴수록, 내 눈동자를 거쳐 간 페이지가 쌓이면 쌓일수록 탄식은 깊어만 갔다. 이유는 다름 아닌 맞춤법이었다.


이 특강만 들으면 3문제를 더 맞출 수 있어요! (X) → 맞힐 수 있어요! (O)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퀄리티 (X) → 저버리지 않는 퀄리티 (O)

익숙치 않은 전문용어 (X) → 익숙지 않은 전문용어 (O)

일일히 확인할 필요 없습니다 (X) → 일일이 확인할 필요 없습니다 (O)

만들어 드릴께요(X) → 드릴게요(O)

문항 갯수(X) → 개수(O)


페이지 곳곳에서 맞춤법 오류를 발견할 때마다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신저도 SNS도 아니고 고객이 구매를 할지 말지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상세페이지에서 맞춤법 오류라니. 그것도 성인을 대상으로 강의와 교재를 판매하는 회사에서, 교육업계에서는 인지도로 따지면 상위권에 든다는 회사에서 말이다.


업무 메일이나 사내 공지글의 맞춤법 오류쯤은 흐린 눈으로 잘 참아왔는데, 매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상세페이지의 맞춤법 오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장점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어필하고, 고객에게 무한한 신뢰를 주어 어떻게든 우리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곳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경쟁사와의 날카로운 신경전과 디스전까지 존재하는, 전쟁터와도 같은 곳이 바로 상세페이지다.


그런 전쟁터에서, 글쓰기의 기본인 맞춤법을 틀리는 회사의 강의와 교재를 어떤 소비자가 믿고 구매할 수 있을까.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상세페이지였다면 담당자의 부주의겠거니 하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교육서비스업은 입장이 다르다. 지식과 정보를 판매하는 교육서비스업은 신뢰가 관건이다. 맞춤법 좀 틀린다고 문맥을 이해하는 데 지장을 주는 건 아니지만, 상품과 서비스의 신뢰도에는 영향을 준다. (나처럼 맞춤법에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안 좋은 쪽으로) 간혹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의미 자체가 왜곡되는 경우도 있다.


더욱이 교육서비스업의 소비자는 상세페이지 의존도가 높다. 옷이나 신발처럼 눈으로 볼 수도 없으며, 노트북이나 휴대폰처럼 성능을 비교하며 고를 수도 없다. 그나마 선택의 기준인 합격률이나 적중률, 강의 만족도 따위는 모든 기업이 1위라고 우기는 판이다. 그러니 소비자는 더더욱 상세페이지의 문구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올바른 맞춤법이 매출을 올려주지는 않겠지만, 단언컨대 맞춤법 오류가 기업의 격을 떨어뜨리고 고객의 발걸음을 돌리는 경우는 분명히 있다. 강사 소개 페이지의 맞춤법 오류는 강사의 이미지를, 교재 소개 페이지의 맞춤법 오류는 교재의 신뢰도를 갉아먹는 요소가 된다. 모두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상품을 예쁘게 포장해야 하는 마케터가 되레 흠집을 내서야 하겠나.


지금 속으로 '맞춤법 실수 하나쯤이야. 아무도 눈치 못 챌 텐데...'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고가의 명품을 판매하는 상세페이지에서 맞춤법 오류를 발견했다고 상상해보길 바란다. 사소한 디테일의 차이가 상품과 서비스, 브랜드의 수준을 결정한다.




자사 홈페이지에서 맞춤법 오류를 발견했을 때의 작은 충격(혹은 창피함)은 내게 긍정적인 자극제가 됐다. 반면교사 삼아 적어도 내가 기획한 페이지만큼은 '칼맞춤법' 페이지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한 문장 한 문장 꼼꼼히 맞춤법 검사기를 돌렸고, 맞춤법 검사기가 잡아내지 못하는 띄어쓰기는 직접 검색해 고쳐나갔다. 디자이너가 틀린 맞춤법으로 페이지를 제작하면 사내 메신저로 쿠션어 잔뜩 넣어가며 제발 수정해달라 요청했다. (짬으로는 막내라 요청이 쉽지 않았다..)


마케터라면, 아니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내 맞춤법 실수가 독자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한 번은 고민해보면 좋겠다.


자, 이제 글을 다 썼으니 맞춤법 검사기를 돌려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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