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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Jun 05. 2024

중간평가받고 가실게요~

결혼기념일, 은혼식

지난 4월 5일은 식목일이면서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를 심는 마음으로 결혼하여 올해 25주년이 되었습니다.

오래도 살았네요.

그동안 두 아이가 태어났고 봄여름가을겨울이 몇 번씩 지나갔습니다

따스한 날도, 바람 부는 날들도, 그리고 눈 내리는 날들도 많았습니다.

그 시간들을 한결같이 함께 해준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저는 한때 비혼주의자이기도 했었습니다.

젊은 날의 치기겠거니 하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고, 나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결혼이라는 제도가 나를 옭아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었습니다.

역시나 결혼은 제 날개를 꺾었고, 대신 사랑하는 두 천사를 얻었습니다.


육아도 처음인데, 이 천사들이 사춘기가 되면서

급돌변하더군요.

어른들이 딱 너 같은 아들 딸 낳아 길러봐라 하시더니,

새삼 온몸으로 어른들의 지혜를 '맞아 맞아' 감탄하며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고, 저도 세상을 보는 눈이 여유로워지니

인연이라는 것이 새롭게 다가섭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가 부부로 만난 인연,

더 잘난 부모도 많을 텐데 나의 아들딸로 태어나

우리가 부모자식으로 만난 인연.

내가 늘 희생하며 산 것 같지만 실은 서로 희생하고

하나씩 양보해서 더 큰 하나를 만들었음을 깨닫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죠.

아무것도 모르니 앞일을 예상하지 못하고 저지를 수 있는 용기가 이십 대에 있었기에 감히 결혼을 준비 없이 했나 봅니다.


결혼하고 첫 싸움은 시동생네 아기 첫돌 선물,

없는 형편에 과한 선물이라고 저에게 뭐라 뭐라 해서

저는 친정 엄마에게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소꿉놀이 같던 결혼생활도 끝나고 이제 현실이 딱 제 앞에 드러났었거든요.

어린아이 달래듯 남편이 저를 많이 토닥였습니다.

못 이기는 척 눌러앉아 이렇게 25년 살았네요.


결혼식 때 비싼 다이아를 했다고 보석상에서 작은 진주알을 선물해 줬었는데

결혼 1주년에 그걸로 진주귀걸이든, 진주반지든 만들고 싶었답니다.

남편은 아직 학생이었기에 부담스러웠을까요.

지금은 형편이 아닌 것 같아, 하며 딱 잘라 안된다고 해서 돌아서서 울었어요.


그 진주가 지금까지 서랍에 있답니다.

지금은 그냥 내가 반지든 뭐든 해도 될 형편인데,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언젠가는 해주길 바라면서요.   

철없는 아내였습니다.


25주년은 은혼식이라 해서 영국에서부터 기념하여 지인이나 가족들이 축하 파티를 해주면서 시작되었다네요.

요즘처럼 이혼이 흔한 세상에서 25년, 또 30년, 50년 사는 것, 정말 축하할 일입니다.


25주년 결혼기념일 한 달 전부터 단순한 남편을 교육시켰습니다.


'꽃과 손편지와 선물은 기본이다.'


저는 이번만큼은 남편과 둘이 같은 브랜드의 손목시계를 하고 싶었답니다.

하지만 몸에 걸치는 것을 귀찮아하는 사람인지라,

절대 자기는 하지 않는다며, 저만 하라고 하니,

그만하고 싶은 의욕이 뚝 사라졌습니다.

이번에도 이렇게 선물은 날아가는 건가요.


하루종일 썼다며 퇴근하면서

무심하게 툭 손 편지를 건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행복했으며 미안한 일도 많았지만
앞으로도
우리는 변함없이 잘 살아보자.


역시 이과형 남자답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담았네요.

매해 기념일에 조금씩 문장이 달라지긴 하지만 같은 내용입니다.


선물은 올해 안으로 주겠다고 하며 자꾸 기대감만 높이고 있네요.

예쁜 꽃은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책상에 두고 오래동안 보았습니다.


지난 시간 가만히 돌아보니,

모두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 화려한 핑크색만은 아니잖아요.

사랑도 가끔은 블루지하고 우울한 회색일 때도 있었습니다.

떠나보낸 시간들이 모두 그립습니다.

머물렀던 공간들도 기억이 선명합니다.


24평 전세신혼집, 미국의 목조아파트, 시카고의 동물원, 박물관, 미시시피강

대전, 서울, 남해, 부산, 제주, 우리의 숨결이 닿았던 곳마다 모두 사랑이었습니다.


낼모레면 건강검진 예약이 있습니다.

양가 부모님이 암이며, 고혈압, 당뇨 모든 병을 가지고 계셔서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저 서로 건강하다면 그것이 25주년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가끔 아이처럼 무언가 갖고 싶다 이야기할 때는

'그래? 주말에 구경 가보자' 하며

한마디 공감이면 될 것 같은데,

이과형 남자는 아마 형편을 재며 현실형 팩트를 또 늘어놓겠죠.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시간들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됩니다.

여전히 작은 일들로 리는 티격태격하겠지만 앞으로의 사계절도 친구처럼, 때로 연인처럼 손잡고 다정하게 걸어갈 수 있기를.


이 글은 제 브런치 백 번째 글입니다.

25주년 결혼기념일을 기념(?)하여 적을 수 있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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