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개인의 삶이 역사적 순간과 만날 때가 있다.
의지와 상관없이 파도에 휩쓸리듯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도 하고, 때로 비껴 서서 관조하게도 된다.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5개월쯤 되었을까 내 인생에도 그러한 순간이 있었다.
결혼을 하고 며느리에게 시댁의 큰 행사는 단연 시어른의 생신이다. 그것이 환갑,
칠순, 팔순이라면 그 의미는 더 커진다.
결혼을 하고 미국에서 곧 시아버지의 칠순을 맞이하게 되었다.
맏며느리로서 의무를 생각하면 곧장 날아가서 축하를 드리는 것이 도리였다.
하지만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건 몇 달 치 생활비를 하늘에 그냥 달러로 뿌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둘째 아이까지 임신 중이었으니 상황을 설명드리면 아버님이 이해해 주실 것도 같았다.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고 좋은 며느리이고 싶었다.
현실적인 이과 남편은 우리 형편에 마음만 표하고, 다음에 한국 들어가서 식사라도 대접하자고 했다.
나는 부득불 고집을 피워, 이제 갓 걸음을 뗀 돌쟁이 아들과, 남편, 임신한 몸의 내 것까지 비행기표를 끊었다.
2001년 9월 10일.
시카고 오헤어공항-인천공항
맞다. 9.11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지 않고서야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찌 알겠는가.
시카고 공항으로 가려면 더모인공항에서 연결 편을 타고 가야 하는데 그날 천둥번개가 치며 비가 오는 상황이었다.
안전을 문제로 당연 크기가 작은 국내선 비행기는 지연되었다.
여유 있게 연결 편 시간을 잡았는데도 지연이 오래된 바람에 우리는 시카고에서 연결편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국내선에서 연결된 수하물만이 주인도 없이 한국으로 날아갔고 우리는 공항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항 관계자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옵션을 이야기했다.
시카고에서 1박을 더하고 같은 시간 비행기를 타는 경우,
아니면 지체하지 않고 지금 L.A로 가서 한국 연결 편 비행기를 타는 경우.
삶은 늘 선택의 문제다.
우리는 엘에이로 가서 곧장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에 도착해서 긴 잠을 자고 일어나니 TV에서 영화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폭발음과 함께 뉴욕 맨하튼의 세계 무역센터와 미국 워싱턴의 국방부인 펜타곤이 테러를 당한 것이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그 광경을 보는데 믿기지가 않았다.
알카에다 주도에 의한 미국의 주요 건물 테러였다.
많은 죽음과 희생이 있었고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며칠 후에 다시 시카고로 돌아가야 했던 남편의 일정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더 강해진 출입국 보안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만일 우리가 시카고에서 1박을 더 하고 출발하는 비행기를 선택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그렇게 예정도 없었던 긴 휴가를 강제로 누린 후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몇 년이 지나 돌이었던 아들, 뱃속에 있던 딸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쯤에
우리는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뉴욕을 방문했다.
쌍둥이 건물은 사라지고 그 자리 그대로 비워 호수를 만들어 과거를 반추하고 있었다.
그라운드 제로.
아픔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희생자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고, 남아있는 자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하지만 9.11 이후에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고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전쟁의 승자는 누구였으며, 또 누구를 위한 싸움이 되었나 깊은 회의감이 든다.
살면서 이런 비극은 두 번 다시없어야 할 것이다.
그라운드제로에 장엄한 조형물들만이 그들의 아픔을 기억하는 듯했고 우리 가족에게도 잊지 못할 한 순간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