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아내와 함께 모 산악회 회원들을 따라 등산을 나섰다.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는 곰배령을 간다기에. 곰배령 등산은 아내의 버킷리스트였다.
전날까지도 비 예보가 있었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고 구름 낀 산행은 정말 쾌적했다.
탐방센터에서부터 5.1km 구간을 두 시간 반 정도 걸려 정상에 도착했다.
점봉산과 설악산 중청봉, 대청동을 배경으로 탁 트인 전망을 가진 해발 1,164m의 곰배령은 스무 명 남짓한 우리들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아직 계절이 안돼서 그런지 곰배령 정상은 천상의 화원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아기똥풀 외에는 온통 푸른 풀밭이었다. 포토존으로 만들어 놓은 ‘천상의 화원 곰배령’ 돌비석을 배경으로 저마다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긴 다음 점심을 먹기 위해 정상 쉼터에 올랐다.
그날의 슬픈 소식은 정상 쉼터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났다.
일행 중 한 분이 난간에 서서 점봉산과 설악산 쪽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뒤로 스르륵 쓰러진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사고 났어요"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요"를 외치며 모여들었다. 열사병 때문에 저러나 싶어 가까이 가보니 입에서 거품을 품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심폐소생술을 실시하고 119에 신고하는 등 난리가 났다. 쉼터에 관리소가 있었지만 제세동기는 없었다.
119 직원과 영상통화를 하면서 대원의 지시를 따라 산악 회원들이 돌아가며 심폐소생술을 계속했다. 이제나 저제나 헬기를 기다리면서... 전화 속의 소방대원은 지금 가동한 헬기가 없다며 계속 심폐소생술을 지시했다. 예상과 달리 헬기가 온다는 소식이 없자 회원들은 돗자리를 넓게 펴 네 귀퉁이를 붙들어 그늘을 만들고 그 밑에서는 회원들이 돌아가며 심폐소생술을 계속했다. 그러는 동안 환자는 맥박이 돌아왔다 멈췄다를 계속했다.
결국 헬기는 1시간 반 만에 도착했고 헬기에서 내린 소방대원들이 제세동기를 이용해 환자의 맥박이 뛰는 것을 확인한 다음 들것으로 헬기에 올려 속초의료원으로 향했다.
산악회원 모두는 점심도 거른 채 하산하여 속초의료원으로 가던 중 집행부원들이 인제군 기린파출소에 들러 사고 경위를 작성하러 가고 회원들은 공영주차장에서 다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릴없이 기다렸다. 한참 시간이 지나 돌아온 집행부원의 입에서 환자가 헬기 이송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풀썩 주저앉았다. 한 가닥 기적을 기대했건만...
사고 당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심폐소생술을 실시하고 인공호흡도 해보고 옷핀을 이용해 손가락 발가락을 모두 따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신속한 헬기 후송이 답이었다. 그런데 그게 한 시간 반 만에 왔으니... 참 한심한 대한민국이었다. 정상 쉼터 관리소에 제세동기도 하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분노케 했다. 그렇게 헬기가 늦는다는 판단이 섰으면 소방대원들이 차량 이동이 가능한 곳까지 와서 산길을 뛰어서라도 왔어야 했다. 그래도 1시간 반은 걸리지 않았으리라.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삶과 죽음이 이렇게 한순간이라니…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이리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인생 덧없음을 느낀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고 슬픈 현장을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봐야 했던 일행으로 무기력감과 참담함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특히 산행 당일 이른 새벽 인사를 하고 떠나보냈을 유족들의 충격과 슬픔이야 감히 짐작도 되지 않는다. 포토존에서 환하게 웃음 짓던 고인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고인의 스러져 가던 모습이 문득문득 떠올라 며칠이 지나도 밤잠을 설치고 일이 손에 안 잡히지만 이 또한 이겨내야 하는 것이 우리 남은 자들의 숙명이 아닌가 싶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