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작만 응원합니까?

저는 시작도 못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by 예스도우

어릴 때부터 나는 남들이 잘 모르는 것, 대중에게 큰 관심을 받지 않는 것을 좋아하곤 했다. 요즘은 홍대병이라고 하던데, 특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겹치는 게 싫었을 뿐이었다. 그중 하나는 프리지어였다. 지금은 MBTI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내가 어릴 때에는 별자리나 탄생화, 탄생석, 혈액형, 이런 것들이 사람의 유형을 나누는 데에 자주 사용됐다.


별자리나 혈액형은 그렇지 않았는데 유난히도 탄생화나 탄생석 같은 것들은 글마다 다 달랐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어떤 날은 가넷과 장미를 좋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사파이어와 목화를 좋아하기도 했다. 그런 유목민 시절을 지나다 어느 날, 어디선가, 내 탄생화를 프리지어로 소개하는 글을 봤고 그 뒤로 지금까지도 나는 내 탄생화가 프리지어라고 믿고 있다.


처음 들어보는 꽃이었고, 샛노란 색감이 좋았다. 프리지어의 꽃말이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라는 걸 알고 나서는 다른 사람들의 시작을 기꺼이 응원해 주는 삶을 살겠노라, 당차게 다짐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지금, 프리지어의 꽃말이 그렇게 괘씸할 수가 없다.


언제까지 당신의 시작만 응원할래?


푸르게 변한 기분은 어지간해서는 잘 돌아오지 않는다. 드넓게 펼쳐진 바다에 한 컵의 빨간 색소를 섞은 물을 쏟아버린다고 해도 몇 번의 일렁거림으로 그 붉은색마저 빼앗아버리듯, 더는 이 푸른 기분을 못 본 척, 아무것도 아닌 척 넘겨버릴 수 없다고 인정하고 나니 그 어떤 색의 물 한 컵도 내 푸른 바다를 물들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프리지어의 노란 꽃잎도 당시의 푸른 기분의 파도에는 힘없이 흘려 떠내려갈 뿐이었다.


그런 나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필요했다. 그게 어떤 방면에서 맞이하는 것인지 그 누구도 몰랐지만 나와 가장 친한 사람인 나 자신은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게 좋은지는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 눈은 다시 내가 지금껏 몸 담았던 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제너럴리스트가 되어보자. 아니지, 요즘 트렌드는 다시 스페셜리스트라던데. 조금 더 빠르게 트렌드를 파악하고 활용할 수 있는 곳으로 가보고 싶다. 지금까지 해왔던 걸 활용할 수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네. 끊임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서로 이어지기만 할 뿐, 그 어떤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네 달이 지났다.


네 달 동안 달라진 건 물리적인 환경이었다. 이사를 하거나 이직을 하고, 익숙한 지역을 떠나 새로운 동네에서 하루하루를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분명 푸른 내 기분을 바꾸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우습게도 어떤 색으로 내 기분을 바꿀지 못 정한 행위들은 모두 짙은 안갯속에서 내딛는 걸음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 내가 어떤 커리어를 쌓아야 할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는 일념 하나로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백지를 찾아 아무렇게나 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겨운 한 발자국들 사이에서 결국 병이 났다.


원인 모를 두통과 어지럼증으로 2주를 넘게 고생한 후에야 이 걸음이 잘못된 길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고, 여전히 내 커리어는 물음표만 가득했으며, 이제는 내 시작을 응원해 달라고 할 대상조차도 없었다. 프리지어의 꽃말은 여전히 괘씸했지만 이제는 애꿎은 노란 꽃잎을 보며 눈을 흘기는 것조차도 할 수 없었다.


즐거워야 하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눈을 뜨는 게 괴로웠고, 집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울증인가 싶지만 그러기에는 다른 일상에서의 문제는 없었다. 푸르게 변한 내 기분의 바다는 오직 커리어 한정이었다. 일상, 애정 전선, 취미 생활, 인간관계 등 나를 이루는 다른 영역에서 나는 갖가지의 찬란한 빛깔로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그 안에서 자라던 프리지어는 자신의 꽃말을 뽐내며 컵케이크 위에 스프링클 설탕 조각을 뿌리듯 노란 꽃잎을 곳곳에 흩날리고 있었다. 전혀 반대되는 내 속의 모습에 답답함은 하늘을 뚫고 차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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