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슬 Dec 18. 2023

일기 사는 여자

나는 내가 일기를 산 일을 알고 있다



7월에 퇴사를 하고 모아둔 돈을 야금야금 쓰며 10월까지 버텼다. 11월 월세를 낼 돈이 없자, 팔 물건들을 정리했다.


1. 퇴사 기념으로 산 소니 헤드폰 (판매 완료)


솔직히 퇴사 할쯤에 홧김이 지른 감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계속 살까 말지 고민했기에 후회 없는 소비였다. 동시에 나중에 당근마켓에 올릴 날을 대비하여 박스와 설명서, 구성품들을 모두 잘 챙겨놨다. 판매 희망 가격은 27만 원.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사용감은 없으며 풀박스다. 당근마켓에 올렸더니, 내가 있는 곳까지 갈 테니 25만 원에 달라고 해서 쿨거했다. 노이즈 캔슬링이 되는 좋은 모델이라, 잠깐 세상의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을 때 유용했지만, 나에게 꼭 맞는 아이템은 아니었다.


2. 작은 아빠가 주신 매직마우스 2 (판매 완료)


맥북을 살 때, 작은 아빠께서 안 쓰는 매직마우스가 있다고 해서 받은 것이다. 알다시피 매직마우스는 사용감이 상당히 구리다. 손목에도 좋지 않으며, 클릭 소음이 엄청나다. 칭찬받을 점은 간지난다는 것 하나 뿐이다. 그럼에도 2년 동안 꽤 열심히 써서 사용감이 많았고, 판매 희망 가격은 5만 원. 이것도 수월하게 팔렸다. 집과 파출소가 가까워서 파출소 앞으로 와달라고 했더니 어떤 남성 둘이 차를 타고 와서 가져갔다. 그리고 며칠 전 아빠가 매직마우스 어디 있냐고 묻더라. 차마 팔았다고는 못하고, 안 써서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둘러댔다.


3. 새소년 LP (여름깃, 비적응) (판매 못함)


지난 여름, 새소년 팝업에 가서 여름깃과 비적응, 두 개의 LP를 사 왔다. 각 5만 원에 구매했고, 내가 가진 LP판 중에 가장 비싼 것들이다. 미개봉 제품은 아니어서, 조금 저렴하게 팔 생각이었다. 당근마켓에 올리긴 한 거 같은데 결국 팔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팔리지 않은 게 조금 고맙기도 하고. 새소년의 노래는 상경하고 신림동에 살던 18년도부터 열심히 들었다. 도림천을 걸으면서 많이 들었고, 그 후에 수 많은 집을 옮겨 다니며 LP로 그들의 노래를 듣기까지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 그 추억을 지킨 것 같은 의미도 있다.


4. 맥북 에어 (판매하려고 했던 게 미친 짓)


이걸 팔기로 생각했단 거 자체가 정신이 어떻게 됐던 게 분명하다. 분신과 같은 노트북을 팔아버리려 하다니. 이걸로 졸작도 쓰고, 브런치도 합격하고, 많은 지원서를 썼다. 난 얘와 어떤 걸 했다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할 것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앞으로 더 많은 지원서와 대본과 글을 쓰고 메일과 영상과 파일과 줌미팅을 처리해야 할텐테 그걸 팔아버리려고 했다니. 이 노트북만은 지켜낸 것이 내가 여름에 한 일 중 유일하게 후회하지 않는 것이고, 만약 팔아버렸다면, 지금 나는 엄청난 후회와 자책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요즘은 맥북에서 많은 글과 문장을 만졌다. 너무 많이 보고 써서 행복할 정도로 넘쳐나는 활자들. 안 팔아서 정말 다행이다.



11월 월세는 헤드폰과 매직마우스를 판매한 돈과 엄마가 보내주신 돈을 보태서 냈다. 12월 월세는 12월에 번 돈과 엄마가 보태 준 돈으로 냈다. 내가 낼 월세는 이제 없다. 끝이 났다. 팔아야 할 물건도 없다.



5. 일기 (사려는 사람이 있을까)


예전에 자신이 썼던 일기를 모두 태워버리고, 그 시절로부터 해방이라고 믿은 여자를 알게 됐다. 일기로 남긴 시절이 너무 괴로워서 그랬다는데, 그걸 보고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생각했다. 죽기 전에 일기를 태워버리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은 해도, 일기를 모두 태우고 그 시절로부터 해방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나의 해방은 일기를 쓰는 것부터 시작이며, 그 일기장을 닫으면, 난 해방된 것이다. 그 일기는 더 이상 나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가 다른 여자의 일기를 대신 써준 것이다. 그래서 난 그 여자의 일기를 읽는 것이 무척이나 재밌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똑같은 내용을 읽으며 참 재밌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22년 여름까지 일기를 써왔다. 그 후론 일기를 뜨문뜨문 쓰게 됐는데, 한동안은 일기를 쓰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일기 강박증에 시달리다가, 이제는 일기 같은 건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일기강박증 시기에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었다. 일기장에 쓸 말이 없다니. 말도 안 된다. 내가 그토록 오랜 시간 일기를 써왔는데, 쓸 말이 없다고? 쓰기 힘들다고? 쓰기 싫다고? 하지만 억지로 쓰는 것은 더 못 할 짓이지. 자연스레 일기는 멈췄다. 그때도 쓰지 않는 일기장을 꼭 들고 다녔다. 언젠간 쓰고 싶어질까 하고. 하지만 이제는 쓰지도 않는 일기장을 들고 다니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 잡동사니를 모아놓는 수납함에 넣어뒀다. 일기를 쓰지 않아도 시간은 가고, 나는 살고, 그래서 일기 같은 건 쓰지 않아도 된다. 사지 않아도 된다.


내가 써놓은 일기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니, 나는 지금까지 시간이란 값을 치르고 그 여자의 일기를 읽은 것이다. 이제는 그 여자도 일기를 쓰지 않고, 나도 일기를 읽지 않는다. 여자는 이제 사거리 대중목욕탕을 봐도 일기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춥다는 말 대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