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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슬 Dec 26. 2023

8월, 속초에서 보냄


속초는 지금 호우경보가 내렸다. 11층 창문 밖으로는 관광객 호객용으로 설치한 화려한 네온사인과 그걸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굵은 빗방울. 아니, 어쩌면 화려한 네온사인은 원래부터 무용지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거대한 파도가 방파제를 때리고 물러났다 다시, 또 온다.


여행을 혼자 다니면 무슨 재미냐는 물음에 항상 제대로 대답한 적은 없지만, 나름의 해방을 바랐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번도 해방된 적은 없는 거 같은데 말이다. 사실 나는 익숙한 것을 매우 좋아하고 갑자기 찾아오는 변화 같은 건 머리 아파하는 스타일인데. 그런데도 해방을 바랐다는 건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해방을 원했던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니면 해방은 오해고, 그냥 지금 눈앞에 있는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걸지도. 우선, 전자부터 말해보자면 나는 해방에 대한 역치가 굉장히 낮아서 혼자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해방이라고 느낀다. 와이드 모니터 앞에 편하게 앉아서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지금도 해방 비슷한 걸 느끼고 있고. 그럼 나는 어떤 해결되지 않는 해방을 위해 자꾸 떠나려 했을까? 조심스레 추측하건대 아마 내 능력에 대한 만족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똑똑하게 읽고, 재미있게 쓰고, 멋있게 말하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자꾸만 대충 읽게 되고, 무겁게 쓰게 되면, 눈치 보며 말하며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해결하려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드는 의문은, 여행과 그것들이 해결되는 데 도대체 어떤 상관관계가 있냐는 거다. 구원 비슷한 것이라도 바랐던 건가. 여행으로 내가 갑자기 깨닫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하길 바랐던 걸까. 약간은 그랬던 것 같고, 결과는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여행만으로, 음악만으로 영화만으로 책만으로 사람이 한순간에 바뀌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으니까, 거의 없으니까. 나 또한 그저 평범한 사람이고, 속초 여행 중에도 그걸 깨달았다. 난 무엇을 위해 여길 왔는가. 후자에 대해서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누구나 도망치고 싶은 순간은 있으니까. 나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었나 보다. 그토록 바랬던 퇴사를 했는데도, 마음이 편하지도 미래가 보이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미래의 내가 제일 잘 알 거다. 현재 많이 지쳐있고, 이대로라면 가을의 어느 날엔 일주일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을지도 모를 거라는 예감. 나는 그럴수록 자신을 구덩이로 더 밀어 넣을 거다. 그건 내가 꽤 잘하는 거니까. 구덩이 깊이는 내가 결정하는 거라면서. 이런 상상의 시작이라면, 충분히 도망치고 싶었을 거다. 실제로 이곳은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아닌데도 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비가 많이 와서 저녁은 숙소에서 간단하게 먹었다. 오코노미야끼를 배달시키고, 맥주와 토마토주스를 사와서 토마토 맥주를 만들었다. 맥주와 토마토주스를 1:1 비율로 섞으면 되고, 토마토주스를 먼저 붓는 것이 나의 조언이다. 영화는 ‘유열의 음악앨범’을 틀어 놓았다. 영화에서 주는 청춘의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아서 재밌게 감상했다. 그리고 다시 굵은 빗방울을 보고 잠에 들었다.


속초에 와서 택시나 도보만 이용하다가, 다음날은 시내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여행지의 재미는 그곳의 시내버스 규칙이라고 생각한다. 노선은 어떻게 되어있고, 배차간격은 어느 정도인지, 승객들은 어디서 많이 타고 어디서 많이 내리는지, 버스에 쓰여 있는 문구는 어떤지, 버스 기사님들의 성향은 어떤지 말이다. 내가 탔던 버스는 ‘해 뜨는 동해’라는 다소 직관적인 문구가 쓰여 있었고, 승객들이 꽤 많이 타고 내리는 버스였다. 버스 아저씨의 운전도 난폭하지 않았다. 동아서점을 들리기 위해 중간에 내리긴 했지만, 그다음에도 버스를 타고 터미널까지 갔다.


동아서점에서는 여행 관련 책을 몇 권 구매했다. 그중에서 소개하고 싶은 것은 아이슬란드 사진집이다. 지금 여기는 쨍한 여름인데, 겨울의 사진을 담은 책을 사는 것이 청개구리 심보를 자극했다. 또한, 언젠간 가보리라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서점에 가기 전에는 충동적으로 영금정에 들렸다. 친구나 애인과 왔다면 들리지 않았을 코스 같은데, 왠지 그날의 날씨가 나를 영금정으로 이끌었다. 동해의 파도는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고, 멀리서부터 힘을 받고 온 파도가 큰 바위를 때리고 흩어질 때면 그저 ‘무섭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속초에 오기 전, 친구가 왜 자꾸 동해로만 여행을 가냐는 말에 ‘동해가 궁금해서’라고 혼자 생각했는데,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다 정도로 끝난 거 같아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지금이라도 조금 덧붙여보자면, ‘무섭다’보다 더 큰 개념인 ‘알 수 없다’라고 답을 내리고 싶다. 궁금한 것이 알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평생 바라보고 생각하고 느껴야겠지. 동해는 내게 그렇다.


속초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한동안은 속초에 갔던 이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가을을 맞이하고 겨울의 초입을 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행지에서 완벽히 떠나야 한다. 해방이나 도망치고 싶은 건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르나, 당장은 머물고 싶어질 때가 와야 한다. 이 편지를 읽고 있는 곳은  완벽히 떠나온 곳이야? 머물고 싶고, 눈은 많이 오니.


어쩌면 이건 속초에서 보내는 편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여기는 눈이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오는 바람에 꽤 많이 쌓였다. 덕분에 화이트 크리스마스 같은 것에도 별생각이 없어졌고. 사는 곳이 읍내와는 조금 멀어서 항상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요즘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다만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라는 할아버지의 말씀과 읍내 가는 길이면 가는 길이 같으니 태워주겠다는 마을 아주머니의 따스함이 더욱 느껴지는 것이 다른 점이겠지. 겨울이 되면, 가려운 곳을 30분은 긁어야 하는 알레르기가 심해져 힘들었는데, 그것도 말끔히 나았다. 이제는 긁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가렵지 않다.


끝으로 이 편지가 무사히 도착한 거 같아, 다행이다.

오래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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