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시작의 끝

스물여섯번째 이야기

by 오 광년


아성의 얼굴 주변으로 눈부신 녹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무대 양 사방으로 설치된 화려한 조명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마 한가운데에서 바늘구멍처럼 아주 작고 예리한 틈이 벌어지더니 더 강하고 선명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 틈은 점점 크고 넓게 퍼져나갔다. 코와 입 부분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던 틈은 결국 그녀의 얼굴을 정확히 반으로 갈라버렸다. 녹색의 광선이 그 안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오며 공기를 뚫고, 화면을 뚫고, 모든 장애물들을 뚫고 통과했다.


멜론이 폭발했다.


그래, 결국엔 오랫동안 아성의 안에 숨겨왔던 멜론이 그 자체의 모습을 온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사람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녹색의 빛이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너무나 순간적인 일이었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아성의 노래 소리.


몇몇 사람이 건물 유리창 위로 아성을 비추던 묵직한 카메라들을 세게 던졌다. 깨어진 창으로 사람들은 새처럼 자유롭게 손을 펼치고 아래로 떨어진다. 줄지어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여기저기 하늘 위에서 사람 새가 나르고, 땅 위에는 환희에 찬 비명소리, 웃음과 오열하는 소리, 탄식하는 소리, 기도하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날개가 허락되지 않은 사람 새는 찰나의 비행을 마감한 후에, 붉은 꽃을 피우고 그 꽃물을 다음 사람이 밟고 지나간다.


텔레비전 화면위로 쓰러진 남자의 뱃속에서 내장이 흘러내렸고, 그 뒤로 칼을 쥔 채 밖으로 뛰어나가는 젊은 남자. 체크 남방을 입은 남자는 길가의 사람들을 두어 명 더 찌르고 마지막으로 달려오던 덤프트럭 밑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찢어진 얼굴 아랫부분엔 옅게 미소를 띠고 있는 입이 보인다.

댐이 무너지고, 산이 흔들렸고, 바다가 일어섰다. 이쪽과 저쪽을 나누던 경계가 무너지고 하나로 모든 게 뒤엉켜버렸다. 너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고, 다른 이의 절망이 그대로 자신의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나를 위한, 너를 위한, 우리를 위한 눈물이 주체할 수 없게 쏟아져 나왔다. 타인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일은 아프고, 고통스럽고, 억장이 무너지며 끔찍할 정도로 외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었다. 그 속에 잊고 있던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타인을 껴안고 그 속의 나를 구하는 일.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


땅 위로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일렬로 줄지어 나왔다. 그들은 한 손을 뻗어 앞 사람의 어깨에 올려두었다.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은, 차가운 마지막도 두렵지 않게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위로가 되었다.


그 행렬의 시작과 끝이 어딘지 알 순 없었지만 그 줄 어딘가에 치원의 모습이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도 여느 사람들처럼 그윽하고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모습은 지구가 만들어지고 나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녹색의 행렬로 기억될 것이다.




2002년 9월 16일 00:28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 두 명의 남자가 팽팽히 서 있다.


“간단한 응급처치는 했지만, 아무래도 내장 파열이 의심됩니다. 이대로 위험합니다. 수술이 시급합니다. 혈압도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 ...... ”


검정 뿔테를 쓴 3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의 하얀색 와이셔츠 는 온통 붉은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와 마주한 또 한 명의 사내는 나이가 꽤 들어 보였다. 그는 대답 없이 한 손으로 면도 자국이 거뭇한 턱 끝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잠시 후, 그는 건조한 목소리로 “가면. 살 가망은 있는 건가?” 라고 짧게 되물었다.

그때, 한 쪽 벽을 차지한 검정색 철문이 열리며 짧은 머리를 한 남자가 황급히 나왔다.


“ 국장님. 그 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놀란 표정으로 서둘러 보안 대기실로 뛰어 들어갔다. 열려진 철문 틈으로 나이 든 사내가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말했다.


“ 자네는 들어오지 말게. 어차피 저 자는 살려봤자 곧 제거될 테니깐.”



철문이 안에서 강하게 닫히고 자동으로 잠겼다.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는 한 손으로 검정 뿔테 안경을 벗어 던졌다.


어둠침침한 대기실 안, 국장을 포함한 다섯 명의 남자들은 숨도 쉬지 않은 채 집중해서 취조실 안의 상황을 관찰했다. 모든 장면이 빠짐없이 녹화되고 있었다.

“ 당신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까? 한 치원 씨?”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는 강하고 냉철한 인상을 풍겼다. 그가 입은 흰색 제복은 천장에 달린 형광등 불빛 때문에 더욱 눈부시게 보였다.


맞은편에는 치원이 깍지 낀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다. 여유로운 표정이다. 그의 오른쪽 팔목엔 수액 주사 바늘이 꽂혀 있었고, 여기저기에 감겨진 붕대 사이로 조금씩 핏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른쪽 뺨에 5cm가량 찢어진 상처 틈 사이로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그가 입을 열었다.

“구원의 뜻을 누군가는 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제복 입은 남자가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당신은 그걸 구원이라고 합니까? 수만 명이 동시에 목숨을 끊은 일을 말입니까?”


치원의 눈은 흔들림 없이 상대를 집중해 살폈다.

“당신은.... 이번 구원을 피해갔군요.”


제복 입은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취조실 유리벽 쪽으로 돌아섰다. 유리 벽 너머의 대기실 안 사람들이 일제히 긴장하여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중 제일 나이가 많은 사내가 마이크에 대고 물었다.

“ 무슨 문제가 있나? ”


목소리는 취조실 안 사내의 오른쪽 귀 안 이어폰으로 전달되었다. 남자의 머리가 미세하게 양 옆으로 움직였다. 아니 라는 뜻이다.


그는 머리가 복잡했다. 치원을 단순히 미친놈, 정신병자로 몰기에는 사건의 수준이 무겁고 상황은 엄중했다. 지금, 자신은 엄청난 재산과 막강한 권력자들의 배후를 조종하던 그림자의 실체와 마주하고 있다. 그 실체는 수만 명의 사람이 죽고 난 자리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단 하나의 생존자로 이곳에 앉아있다.

“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쇼.”


등 뒤로 들려온 목소리에 남자의 머리털이 삐쭉 섰다. 고개를 돌려 치원을 쳐다본다.


“ 당신은 질문하고 나는 답합니다. 서두르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남자는 호흡을 가다듬고, 평정심을 찾으려고 애썼다.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 ... 그 구원이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집단 자살과 연관이 있습니까?”

“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의 마음을 연결한 것뿐입니다. 나와 당신이, 하나가 되는 거죠. 모든 걸 서로 똑같이 느끼고,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그게 죽음이라도.”


치원의 말이 끝나고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남자는 탁자 위에 그 날의 영상 화면이 녹화된 비디오 장치를 재생한다. 화면 안에서 강렬하게 뿜어 나오는 녹색 빛이 하얀 제복 위에서도 일렁거린다.

“이 녹색 빛은 뭡니까? 몸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빛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데....”


“그건 멜론입니다.”


“멜론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멜론. 멜론이라고 부르죠. 그것을 몸에 지니고 있는 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고 생각을 읽을 수가 있죠. 인간으로썬 그녀가 유일했습니다.”

“... 인간으로썬? ...”



남자는 재생되는 영상의 화면을 중지하고, 치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그는 더 지쳐보였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그의 생존 시계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 단순한 집단 환시로 인해 벌어진 미스터리한 현상이 아닐까요? 지금 한 치원 씨의 말은 사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아성씨와 당신이 회색교회의 핵심인물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이단이란 말이죠. 이번 일은 광신도들의 테러라고밖에는 설명되지 않고요.”


확신에 찬 남자의 말이 끝나자, 치원의 가느다란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웃었다.


“...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마십쇼. 인간이 가진 끝없는 욕망과 오만한 독선이 계속된다면, 언젠가 똑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거요. 그 때는 한명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심판한단 말입니까?”


남자의 말에, 치원은 매우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당연하죠.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거대한 세상 속에 찍힌 작은 점. 그게 우립니다. 그렇게 하찮고 미미한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모든 것에 귀를 열어야 합니다.”


치원의 말이 끝나고,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녹화 장치의 불은 계속 켜진 상태이고, 방 안의 공기는 뜨겁고 습하게 데워져 있었다. 유리벽 너머의 회색 방안은 무거운 침묵의 입자가 떠다녔다.


시간은 흘렀고, 치원의 생명도 그 끝에 거의 다다랐다. 탁자 아래로 흘러내린 핏방울이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그 주변을 질척하게 적셨다. 그러나 남자의 이어폰엔 어떠한 지시사항도 전달되지 않고 있다. 치원은 이 자리에서 곧 죽게 될 것이다. 남자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치원이 남은 힘을 다해 눈을 들어 정면을 보았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 되길 바랍니다. 이 구원을 당신들이 무시해버린다면, 끝은 다시 시작으로 태어날 겁니다. 반드시 ..... 기억하십시오. 끝은 처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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