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그 날

스물 다섯번째 이야기

by 오 광년

2002년 9월 15일 05:45


비가 내렸다.

비는 어젯밤, 한밤중이 지나서 내리기 시작하여 새벽이 지나 주변이 밝아질 때까지 쉬지 않고 내렸다.


잠든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괜스레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게 좋다. 치원은 베개 위로 떨어진 아성의 머리카락을 결대로 어루만졌다. 하나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는 지난 해, 유선과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려 본다.


아성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에, 저택을 나가는 유선은 생각보단 담담해보였다. 유선은, 뒤돌아 자신을 배웅하는 치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 당신을 보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10년 동안 매일, 생각했죠. 내 손으로 내 딸을 여기 데려다 놓게 한 그 모든 것들이.... 꼭 당신들이 조종한 일인 거 같아서 죽도로 미워하고 증오했었죠. 하지만 .... 이제 와서 애미라는 이름으로 아성이를 만나니... 분명 그 아이가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사랑받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건....특별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아이를 낳은 어미로써 아는 겁니다.”


치원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잠시 후, 그는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 차를 준비했습니다. 타고 가시죠.”


유선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치원이 있는 쪽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 만약, 우리 아성이에게 어떤.. 일이 생긴다면.. 당신을 어떻게 벌줘야 하나 생각했었죠.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 같네요. 내가 주지 않아도, 당신은 충분한 벌을 받을 것 같군요. 당신, 스스로 말이죠.”


- 당신, 스스로 말이죠.


마지막 그 말이 메아리처럼 치원의 귓가에 맴돌았다.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치원.


그 때, 치원의 손을 맞잡는 아성의 손이 느껴진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촉감이었다.


“ 어..깼어? 미안하구나.”


조금 당황한 치원의 모습을, 침착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아성. 새벽의 어둠 안에서 아성의 눈이 슬프고 묘한 빛으로 반짝인다.


“ 아픈 생각하지 마요.”


아성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두 팔로 치원을 감싸 안았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착한 아이처럼.

“ 지금이라도... 멈출 수 있어....”


치원의 목소리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여자의 품에 안긴 남자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 슈우우우우- ”


아성은 잠이 깬 아이를 달래듯 남자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 난 길잡이에요. 누군가가 대신해야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요.”


아성은 자신의 품에 안긴 치원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려 두 눈을 마주쳤다. 깊고 정직한 시선이 오고 갔다. 그녀는 남자의 오른쪽 눈가에 천천히 입맞춤을 했고, 남자는 작별과 구원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2002년 9월 15일 17:30


서울의 가장 높고 화려한 곳으로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 중 몇몇 유별난 아이들은 ‘아성의 노래를 들어라’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


“ 와, 정말 오늘 역사적인 날이지 않냐?”


“ 그러니깐, 여신 아성님의 실물을 볼 수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 사람들, 진짜 장난 아니게 왔다. 아직 세 시간 넘게 남았는데 벌써 줄이 이렇게 길어?”


“ 야, 무슨. 어젯밤부터 여기서 잔 사람들도 있대. 우린 늦은 거야.”


“ 아,,,, 그래.... 어떻게 그럼. 우리 가까이서 못 보는 거야? 아 ... 씨...”


교복을 입은 아이들, 그보다 조금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젊은 무리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그곳엔 나이와 성별을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수개월 전부터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넷, 길거리, 커피숍 등 곳곳에 아성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이 세상을 훑고 지나가는 모든 유행가들의 시작은 그러하니깐. 그러나 사람들은 ‘아성의 노래’를 그저 그런 보통의 노래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의 노래는 무언가 특별했고, 그 특별함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마음을 온전히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아성의 목소리는 아무리 반복해서 들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허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수많은 사람들을 ‘오늘’, ‘여기까지’ 이끌었다.



2002년 9월 15일 20:45


(부산, 해운대 근처 술집)


희미하게 피어올라오는 담배 연기 안으로 욕설이 섞인 농담과 장난들이 오고 간다. 부딪히는 차가운 맥주잔 사이로 멀리서 파도 부딪치는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열 댓 개 정도 되는 테이블마다 손님들로 가득 차 있고, 그 중 체크남방을 입은 앳된 얼굴의 사내가 일어나 텔레비전 채널을 바꾼다. 뉴스 화면이 화려한 조명으로 채워진 무대 위로 바뀌었다.


저 멀리서 “ 어이, 학생 그 뭐꼬... 뉴스 보는데...” 50대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볼멘소리로 말한다. 가게 안의 북적거림이 가라앉고 모든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 아, 아저씨... 죄송함미데이... 근데 쫌 있음 진짜 중요한 가수가 노래를 해가지고예...

텔레비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온다고 카네예.... 양해 좀 부탁드립미데이...”



리모컨을 든 사내가 머쓱한 얼굴로 대답한다. 그러자 중년의 사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 그래? 뭐 그른 가수가 다 있노? 희한하네~ 뭔 노랠 부른 가순데?”


그러자, 술집 안의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가리킨다. 중년의 사내 두 눈을 껌벅거리며, 이 상황이 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 허헛~ 사장님~ 이 노래요~ 지금 술집에서 나오는 이 노래 부른 가수, 맞지요? 학생!”


인상 후덕해 보이는 술집 사장, 카운터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며 말한다.


“ 아~ 그른기가. 이 노래 부른 가수? 맞나~ 그람 함 보자. 나도 이 노래가 이상하게 땡기드라고.”


그제야 술집 안에 모인 사람들, 일제히 텔레비전 화면을 주시한다. 간간히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9시가 가까워지자 말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2002년 9월 15일 20:59


서울의 가장 높은 건물에서 맨 꼭대기 층, 화려한 조명이 빛처럼 쏟아지고 각각의 음향기기, 부속 기계들이 완벽히 준비를 마쳤다. 천여 명의 관객들이 무대를 감싸고 있고, 그 안에 들어올 수 없는 수천 명의 사람들은 건물 밖에 설치된 전광판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 밖의 수만 명의 사람들은 텔레비전 화면에 더욱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그녀를 느끼기 위해.


9시 1분전,

모든 조명이 꺼지고, 건물의 유리 천장이 양 사방으로 열려 흐릿한 달빛이 무대 한 가운데로 비쳤다. 아래에서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고 여자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 아~ 하....”

“ 아아......”


여기저기서 탄성 소리가 새어나왔다. 느릿하게 퍼지는 음악 소리와 함께 아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살아나는 조명과 불빛들. 발아래부터 위로 천천히 비쳐지고 마침내 아성의 전체 모습 화면에 잡힌다.


“ 어쩜, 너무 아름답다.”

“ 아하.... 세상에.... 말도 안돼...”

“ 어떻게 저런 목소리가.... 사람이 아닌 것 같아....”


흥분과 감동에 휩싸인 관객들과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더 깊게 노래 안으로 빨려든다.


바다 속에서 일렁이는 세드나의 머릿칼처럼, 아성의 긴 머리카락이 도시의 바람결에 따라 사방으로 퍼진다. 오묘한 빛을 띠며 반짝이는 아성의 눈동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들을 빠짐없이 흡수한다. 호기심과 두려움, 애정과 분노, 이성과 감정, 처음과 끝, 생과 죽음이 그 안에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천여 명의 관객 속에 섬처럼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한쪽 눈을 가린 남자가 보인다. 잠시, 두 사람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첫 번째 노래 끝이 난다. 사람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 보내고, 열렬히 환호한다.



두 번째 노래 멜로디 바로 시작되고, 여자의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진다. 허공 위에 떠다니는 음표들 속에서 수십, 수백 개의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실처럼 뽑아져 나왔다. 손은 반짝이는 녹색 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노래가 퍼지는 곳곳마다 떠다니며 사람들의 뺨과 귀, 그리고 가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녹색의 손이 스치고 지난 자리마다 달큰한 냄새가 풍겼고,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벌어졌다. 공기 중을 떠다니던 정상적인 감각이라는 것이 말끔히 사라진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그들을 조종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하나씩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사람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사람,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쥐어뜯는 사람, 땅 바닥위로 네 발로 기면서 입을 맞추는 사람, 자신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사람, 배를 바닥에 깐 채 엉덩이를 치켜들고 기도하는 사람, 옷을 하나 둘 벗어 던지고 완전히 나체를 드러낸 사람, 입을 벌려 그 안으로 깊숙이 자신의 손을 넣는 사람....


그 사이로 흐르는 아성의 노랫소리. 쇼는 끝을 향해 치닫는다.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4화24. 구원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