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구원의 시작

스물네번째 이야기

by 오 광년


예배당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신도들이 밖으로 나왔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침착하고 느긋해 보이는 발걸음이었으나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들의 얼굴 여기저기에 상처나 멍든 자국이 있으며, 일부는 다리를 심하게 절거나 다른 이의 부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한없이 평온하고 만족스러워 보인다. 늘 그래왔듯이, 대기 장소에서 일렬로 줄 서 있다가 그들은 하나, 둘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예배당 입구에 남아있던 마지막 신도까지 사라지자,


“ 저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군요. 고래의 생각처럼.”


라고 아성이 말했다.


그녀는 교회의 꼭대기 층에서 창문을 통해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에 있던 치원이 조용히 다가와 소녀의 머리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 이제 좀 쉬어... 너무 긴 새벽이었어.”


그의 목소리가 설탕가루처럼 소녀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던 아성의 몸이 위에서 아래로 녹아내렸다. 치원은 정신을 잃은 아성을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해마다 같은 날, 중앙 예배당의 새벽 모임은 계속되었다. 바로, 눈앞에서 구원과 기적을 맛본 이들은 회색 교회에 더없는 충성과 믿음을 바쳤다. 비밀은 그들을 더욱 강하게 결속시켰다.


“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십니다.”


수행원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와 멜란지색 슈트를 입은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 네, 괜찮습니다.”


중년의 남자는 외모만큼이나 차분하고 온화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형을 가진 남자는 새벽 모임의 신도들 중 한명으로, 휠체어를 타던 노인의 아들이다. 그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테이블 위에 놓인 붉은 색 차 한 모금을 마신다. 강렬한 빛깔만큼이나 향기도 독특했다. 남자는 찻잔 가까이 자신의 코를 갖다 대었다.


“ 동백 향기가 강하죠? 취향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어느샌가 응접실 안으로 걸어 들어온 치원,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어김없이 오른쪽 눈 주변을 검은 머리칼로 가리고 있었지만, 그가 빼어난 미남자라는 사실은 감출 수 없었다. 정확한 나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외모였다. 너무 오랫동안 자신이 치원을 쳐다봤다는 생각이 든 남자가 민망함을 감추며 말을 이었다.

“ 아~ 동백이었군요. 몇 번 동백차를 맛 본적은 있는데 이런 맛은 처음입니다.”

남자와 마주 앉은 치원이 그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 제주의 동백은 유난히 향이 강하죠. 차가운 눈밭에 송이째로 던져 일주일을 견딘 것을 차로 우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것보다 강한 생명력을 가진다고 하더군요.”

“ 그렇군요. 꽃도 시련을 겪어야 더 아름다워지나 봅니다.”

“ 꽃이나, 인간이나 생명이 붙은 것들은 다를 게 없죠. 거의 비슷합니다. 아버님 일은 ... 안타깝습니다.”

치원의 말이 떨어지자, 남자의 미간이 조금 움츠러들었다.

“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미 아흔이 넘으신 나이였고, 마지막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두 발로 걸으시고 ....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계속되었죠. 그 날 이후 말이죠. 아시겠지만... 그 덕분에 저도 안정적으로 회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아버지의 상태가 회사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었죠.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고 주주들이 밀어붙이고 있었을 때라.... 제가 너무 딱딱한 이야기만 오래했군요.... 아무튼 그 분의 구원 덕분에 모든 게 제 자리를 찾게 된 거죠.”

“ 그렇군요. 그 구원이란 걸... 더 넓혀 볼 생각입니다.”

치원의 목소리가 무겁게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에 맞추어 남자의 눈빛도 더 깊게 빛났다.

“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있다면 기꺼이...”


“ 기꺼이 준비가 되셨습니까?”


치원의 선명한 눈동자 속으로 남자는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무언가를 느끼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 최대한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새로운 그 분’을 세상에 알리는 일입니다.”


남자의 두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혈색 좋은 얼굴이 금세 흙빛으로 변해버렸다.



2001년 12월 3일


소녀는 이제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그녀가 이곳으로 온 지도 10여년의 시간이 지났다. 검정 먹물을 담은 듯 일렁이던 큰 눈망울은 여전했지만, 그 속으로 말할 수 없는 깊이가 더해져 기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아성은 에메랄드빛으로 감싼 벽 한 가운데 놓인 전신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꼼꼼히 비추어 본다. 하얀색 칼라가 돋보이는 검정 원피스를 입은 아성, 단정하고 상냥해 보이는 느낌이다.

“ 엄마가 마음에 들어 하실까? 날 알아보실까?”


유성이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린다.


지금,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성과 그녀의 어머니, 유선이 있다.

그간의 세월의 공백을 지울 수 있도록, 아성은 그녀의 어머니에게 밝고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한없이 설레고 가벼운 마음만을 가지기에는, 두 사람 모두 상처가 깊다. 연신 아성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마음의 무거움이 지워지지 않았다.

어머니와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벽. 그 벽을 통해 어머니의 뜨겁고 쓸쓸하고 괴로운 마음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달되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생각을 그대로 읽을 수밖에 없는 아성. 자꾸만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고 있다.


광장처럼 드넓은 응접실 한 가운데에 디귿 자형태의 소파가 묵직하게 놓여있다. 소파의 왼쪽 끝에 아성의 얼굴과 묘하게 닮은 중년의 여성이 앉아있다. 유선이다.


그녀의 얼굴 위로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지만, 선해 보이는 인상은 그대로다. 테이블 위의 찻잔을 하릴없이 만졌다가 떨어지는 손.


이름 모를 감정의 덩어리들이 방안 구석구석을 채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10여년 만에 ‘딸’과 만나는 지금. 그녀의 감정이 슬픔이든 두려움이든 애틋함이든 원망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흘러넘치는 건 당연했다. 감정의 바다 안에서 그녀가 질식하기 전, 다행히 문이 열렸다.


활짝 열려진 문 사이로, 빛보다 찬란한 딸, 아성이 서 있었다. 여인의 몸으로 자라난 딸이지만, 여전히 유선의 눈에는 그냥 작고 작은 아이였다.


‘ 내가 저 아이를 여기로 보냈지.... 저 조그만 것을 말이야.’


유선의 다리가 심하게 떨렸다. 잠시 일어났지만, 곧바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눈물이, 아니 머리위로 폭포가 쏟아지듯 그녀는 오열했다. 중년의 여자가 어린 아기처럼 엉엉대며 울었다. 손등으로 연신 눈가를 비벼대며 비명을 지르듯 “ 미안하다”라고 소리쳤다. 가슴 속에 새겨질 정도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오랜 세월, 그 숱한 말들을 준비해놓고선 결국 한다는 말은 고작 “미안하다”라니...시작도 없고 끝도 없을 것 같은 울음이었다. 아성은 달려와 그런 자신의 어머니를 한 품에 안았다.

어머니의 눈물만으로, 아성이 느낀 지난 세월의 허전함이 빈틈없이 채워졌다. 눈물범벅이 된 두 모녀는 꽤 긴 시간, 서로의 얼굴을 말없이 쓰다듬었다.


“ 나를 ... 이 엄마를 원망하지? 엄마 자격도 없다고...”


유선이 시들어 버린 꽃처럼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 아니에요. 절대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건 엄마뿐이에요.”


아성이 환한 미소로 답했다. 그런 딸의 어여쁜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유선은 말했다.


“ 그 땐, 내 인생이 원망스러웠어. 내 정신과 몸을 통제할 수가 없었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너를 낳고 키우면서 너무 행복했어. 지옥에서 나를 꺼내준 건 너야. 나를 구원했어. 니가. 그런 너를 내가 끝까지 지키지 못했구나...”


잠시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아성은 침착하게 그런 유선을 달래듯 어루만졌다.


“ 고마워요. 이 말 해주고 싶었어요. 엄마한테. 나를 낳아준 거. 그리고 여기로 보내준 거. 힘들었겠지만, 그리고 날 보내고 나서 더 힘들었을 테지만. 그래도 엄마의 역할을 다 해 준거. 정말 고마워. 내 존재가 있었던 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엄마,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해요. 세상이 우리에게 바라는 건. 그거 하나예요.”


꽤 오랫동안 유선은 차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아성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딸은, 이미 자신이 아는 범주의 사람이 아니었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이를 확인하니 가슴이 찢기듯 쓰라리면서도 한편으론 대견했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이었다. 딸의 손을 잡고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딸의 발바닥 위로 키스를 퍼붓고 기도를 올리고 싶은 마음이 격정적으로 싸움을 했다.


그 때, 응접실 문이 열리고 그 틈 사이로 치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다, 다시 밖에서 문을 닫았다. 아성은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포근히 유선을 안았다. 작별의 인사였다.



“ 엄마, 마음의 짐, 이제 털어버려요. 내가 당신을, 구원했어요. 고통에서 벗어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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