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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자 Mar 08. 2023

영화로 보는 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영화 속 인물을 통해 관찰하기

극장에서 영화를 처음 봤던 나이가 10살,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시에서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이었는데 특별히 아이들만 초대하는 행사였던 것 같다. 영화관 입구 담벼락부터 줄을 서는 것도 처음이었고, 팔걸이가 있는 폭신하고 빨간 의자에 앉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대형 스크린으로 보이는 장면에 따라 여럿이 함께 웃고 야유를 보내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싫지 않았다. 그때 봤던 만화영화 제목이 <꾸러기 발명왕>이었는데 실험하다가 실수로 폭발이 일어나 얼굴이 검게 그을리는 장면에서 함께 웃었던 소리가 아직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 이후로 영화관에 간 것은 중학생이 되고 서다. 어른이 동행하지 않아도 어디든 자유롭게 쏘다닐 수 있던 때다. 주말이면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시내로 친구들과 놀러 나갔다. 거기에는 영화관이 3개나 있었다. 서울에서도 보러 올 정도로 최신작을 빨리 상영했다. 주말이면 온갖 패스트푸드점에 10대 여학생들로 가득 찼다. 나의 10대 시절은 친구들, 국도극장과 중앙극장, 조각피자 세트, 콤보밀 세트에 대한 추억이 가득하다. 월요일이 되면 주말 사이 본 영화에 대한 평으로 수다를 시작했고, 다음엔 어떤 영화를 보고 어떤 메뉴를 먹을지 선택하는 것에 꽤나 진지했다.      


20대도 마찬가지로 친밀한 인간관계가 영화관이라는 곳으로부터 형성되고 유지되었다. 영화를 같이 본다는 것은 학연, 지연, 그 외 어떤 경로로 만나든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는 관문이었다. 젊은 시절의 영화관은 타인과 감정을 교류하는 주된 공간이었다. 영화를 함께 본다는 것은 서로의 감정과 그에 대한 변화 과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감정을 교환함으로써 관계의 밀도는 영화관을 얼마나 같이 가는지에 대한 척도였다.

     

수희라는 친구를 좋아했다. 다르게 생긴 3명의 언니와 친구처럼 지내고, 좋아하는 책과 작가, 좋아하는 영화와 배우에 대해 술술 이야기하는 그녀가 좋았다. 우리는 ‘늑대와의 춤을’ 보고 케빈 코스트너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가 나온 ‘로빈 후드’, ‘JFK’도 함께 봤다. 수희는 이야기하다가 종종 나의 취향도 묻곤 했는데, 나는 그녀만큼 설명을 잘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한 번은 그녀가 그런 나를 답답해한 적이 있다.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했는데 나는 끝내 명쾌하게 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순간 그녀와 멀어졌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영화를 보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20대 중반 즈음 혼자서도 영화관에 가기 시작했다. 정독도서관 앞 작은 영화관을 나오며 ‘난 이런 영화를 좋아해’라로 혼잣말을 한 기억이 난다. 아마도 ‘에릭 로메르’ 감독의 특별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수희와 멀어진 것에 대한 이유를 표현이 서툴렀던 나에게서 찾고 있다. ‘수희는 좀 더 나와 소통하고 연결되고 싶어 질문한 건데 대답이 분명하지 않으니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네.’ ‘많은 것을 알아가며 좀 더 깊은 관계가 될 수 있었는데 아쉬워.’ ‘사실, 난 영화에 대한 질문이 취향이 아니라 시시비비로 가거나, 나의 취향이 낮은 평가를 받을까 조심스러워했던 것 같아’라는 생각을 하면서.     


돌이켜 보면 수희와 영화를 보러 다닐 때 나는 영화 자체보다 수희랑 같이 어울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당시 나의 취향이랄 게 분명하지 않았고, 굳이 내 취향을 주장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수희와 멀어진 후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를 잘 설명할 수 있어야 관계가 유지될 거라는 가설이 생긴 듯하다. 타인과의 관계를 쌓는 것보다 나에 대해 좀 더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걸 이제야 설명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온전히 영화에 집중하고 싶을 때, 드는 감정에 충분히 머물고 싶을 때,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들여다보고 싶을 때, 홀로 보는 영화는 안락했다. 혼자 영화관에 가는 것은 나의 취향이 형성되는 과정에 온전히 집중하는 행위이다. 타인과의 관계를 위해 취향에 맞지 않는 영화를 억지로 좋게 표현할 필요가 없어졌다. 나의 관심은 의미를 통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말하자면 나이가 들수록 영화 보기는 성찰을 위한 수단에 가까워지는 셈이다.     


슈퍼맘이 되고자 바깥일과 집안일을 병행하다 보니, 영화관 나들이가 10년 가까이 멈췄던 시기가 있다. 그리고 육아와 가사에 대한 반복되는 힘겨루기 대화에 지쳐갈 때 동료로부터 비폭력대화 교육과정을 듣게 되었다. 한국비폭력대화교육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비폭력대화(NVC)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제공하고, NVC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기관이다. 단순한 대화기법이라 생각했지만 점점 더 영혼을 수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곳에서 운영하는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파악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데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NVC 3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 사랑과 안전 그리고 자유라는 욕구가 채워졌을 때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뻣뻣했던 온몸이 말랑말랑해지고 부풀어 오르면서도 긴장이 풀려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외에도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벅차오름도 느꼈다. 평소 자유와 안전, 사랑에 대해 그려봤던 그림과 다른 그림이 그려졌는데, 그것은 아주 낯설었지만 경이로웠다. 다른 사람이 채워주기만을 기대했던 틀이 깨지고 스스로 채우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나는 사랑과 안전, 자유를 채우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범위를 점점 확장해 나아가고 있다. 


나를 들여다보면서 사랑하고 안전하고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나는 물론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욕구라는 것을 가슴으로 느꼈다. 그런데 이 욕구들을 채우는 방식은 개인마다 너무 다양하고, 어떻게 구현할지 몰라 때를 놓쳐 문제가 된다. 그래서 답답함과 슬픔, 심지어 두렵고 절망스러움과 같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생기고, 결국 관계가 불편해지는 일이 벌어진다.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존재들과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영화를 보는 것은 결국 내 기억에서 존재하는 사람들, 그들과 엮여있는 어수선한 상황과 감정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며 명료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 보기는 과거의 그 일이 다시 살아나 나를 다시 불편함 속으로 빠지지 않게 하는 과정이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랑, 안전, 자유가 어떻게 상실되었고, 이 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지금 나는 당장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를 확보하려는 노력이다.      


나는 지금 남들에게 나를 보이는 글로 인해 생길 나쁜 일들을 미리 걱정하지 않고 글 쓰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나를 잘 보이게 쓰는 글이 나에 대해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직면의 과정이고, 이를 통해 나답게 살면서도 평화로울 수 있음을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길에 있어 보니 참 고되다. 그러나 해야 하고 할 수 있고 하고 싶다.      


‘남의 큰 상처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프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흔히 쓰이는 걸 보면, 손톱 밑에 가시 하나 없는 사람이 없지 않을까 싶다. 사랑, 안전, 자유를 손톱으로 보고 충족되지 않아 생긴 부정적인 감정을 손톱의 가시라고 해봐도 좋을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일들에 아파하고 있을 때 나는 내 가시를 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조금 운이 좋으면 누군가의 가시도 빼줄 수도 있고, 빠진 자리에 남은 통증도 없애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다시 가시가 박히더라도 이전보다 빨리 빼낼 수 있게 서로를 응원하는 수단으로 내 글이 쓰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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