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었다. 스스로 쪽팔림을 감수했던 건.
중학교 2학년 초. 국어 시간.
좋아하는 여선생님이 담임이 되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이던 나는 아직 반 아이들과 친해지기 전이었고 선생님도 나에 대해 전혀 몰랐을 때였다.
나의 존재를 어필한다거나 관심받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전 시간에 작문 숙제가 있었고, 초등학교 때부터 문예반이었던 나는 글을 꽤 잘 썼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글쓰기밖에 없었던 셈이다.
어떤 소재를 써야 하나 고민하다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소설을 끄적거리던 솜씨를 발휘해 사춘기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로맨스 콩트를 쓰기로 한 것이다.
당시 나는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 다녔으므로 버스를 타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요즘처럼 남녀공학이 없던 시절이라 등하교 시간에 버스 안에서 남학생들을 만나는 건 모두의 흥밋거리였다.
버스 안에서 잘생긴 남학생을 봤다거나 그 학생이 가방을 받아줬다거나 하는 얘기가 여학생들을 설레게 했다.
금기는 늘 짜릿한 법.
드러내놓고 남녀학생이 만나는 걸 불순하게 여기던 시절에 로맨스 소재를 작문 숙제로 낸다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쪽팔림을 감수해야 하는 건 오로지 금기를 어긴 내 몫이었다.
마침내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혼이 날까 가슴이 조마조마하던 나는 선생님의 안색을 살폈다. 어쩐 일인지 선생님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얘들아, 작문 숙제 잘 봤어. 그중에서 한 편을 뽑아 00 잡지에 투고할까 해.”
청소년들이 즐겨보던 잡지 이름이었다. 뜻밖의 소식에 아이들이 와아, 함성을 질렀다. 어떤 글이길래 선생님이 잡지에 싣겠다는 걸까. 너무 궁금했다.
“이조영. 너무 재밌더라.”
다시 생각해도 웃긴지 두 볼이 상기되어 꺄르르 웃으시는 선생님.
‘킥킥. 내가 좀 웃기게 쓰긴 했지.’
너무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아 코믹도 적절히 넣었더니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선생님이 재밌으셨다니 난 그걸로 됐….
“읽어줄게. 너희도 들어봐.”
‘아악! 선생님, 안 돼요! 그걸 애들 앞에서 읽으시면 어쩌란 건가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너무 쪽팔려서.
로맨스 콩트를 작문 숙제로 낸 걸 알면 또라이로 볼 게 분명했다.
난 그저 선생님 한 분에게만 나란 존재를 알리고 싶었을 뿐인데 일이 너무 커져버린 것이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나도 모르게 책상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리고 선생님이 내 글을 다 읽으실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너무 오래돼서 내용이 다 기억나진 않지만, 버스 안에서 만난 남학생과 여학생이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설레는 마음을 쓴 것이었다. 그러면서 뭔가 꼬여가는 코믹한 상황을 섞은 로코였다.
아이들이 꺅꺅거리는 소리와 와르르 웃어대는 소리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선생님과 아이들의 뜨거운 반응을 예상하지도 못했지만, 막상 체감하고 보니 창피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미쳤어, 정말.’
‘어흑! 내일부터 등교하지 말까?’
‘아냐. 애들 반응을 봐. 너무 좋아하잖아.’
‘선생님이 내 글을 소개해 주시다니. 완전 스타 된 기분인데?’
창피함과 우쭐한 기분이 범벅되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조영. 고개 들어.”
글을 다 읽고 난 선생님이 말씀하시고 나서야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겨우 들을 수 있었다. 박장대소하는 아이들을 보며 책받침으로 부채질을 파닥거렸다.
“너 글 참 잘 쓴다. 작가 해도 될 거 같애.”
선생님의 칭찬에 뿌듯함은 더해갔고, 그날 이후 반 친구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완전히 달라졌다. 존재감이라곤 없던 내게 친구 하고 싶다며 먼저 다가와 준 아이도 있었다.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칭찬받는다는 건 작가가 꿈인 사춘기 소녀에겐 엄청난 관심이었고 희망이었다.
만약 내가 그때 용기를 내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쪽팔림을 감수하고서라도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내가 쓴 글을 보여드려서 특별한 아이로 각인시키고 싶었던 발칙함.
내가 훗날 로맨스 작가가 된 것도 그때 선생님의 칭찬과 격려, 그리고 아이들의 뜨거운 호응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선생님 반응이 시원찮으면 어쩌나. 날 불량소녀로 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많았다. 뭐 이런 글을 쓰냐며 창피를 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깨고, 나는 내가 원하는 글을 씀으로써 두려움을 넘어섰다.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쪽팔렸지만, 그건 잠시였을 뿐.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꼭 그 일뿐 아니라 살다 보니 알겠다. 성장의 밑거름은 그 쪽팔림을 감수했을 때 가능한 거라고. 실수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쪽팔리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스스로 쪽팔림을 감수하는 용기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
타인에 의해 쪽팔림을 당하는 게 아닌 스스로 쪽팔림을 용납할 줄 아는 사람 말이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은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살면서 가장 쪽팔렸던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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