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정상 여성 지휘자는 무엇을 휘둘렀을까
옛날 옛적 장 바티스트 륄리라는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 겸 지휘자가 있었다. 그는 거대하고 끝이 뾰족한 지팡이를 바닥에 쿵쿵 내리 찍으며 박자를 맞추며 지휘를 했다고 한다. 연주자들에게 그 소리가 거슬리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륄리는 더이상 쿵쿵대며 지휘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커다란 지팡이로 자신의 발등을 찔러 파상풍에 걸렸고 결국 사망한 것이었다.
리디아 타르, 의심의 여지 없이 세계 최고의 지휘자로서 순항중인 그는 뉴욕 페스티벌의 한 세션에 나와 청중에게 자신의 음악관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장 바티스트 륄리의 일화를 농담처럼 꺼낸다. 어이 없는 죽음에 다들 깔깔 웃는다. 이 일련의 토크쇼를 붉은 머리의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고, 타르의 농담은 스스로에게 예언처럼 작동한다.
영화 <타르>는 정상의 자리에 오른 한 지휘자가 사회적으로 추락하는 이야기다. 카리스마 있고 권위 있으며 지휘자답게 사람 또한 교묘하게 잘 ‘지휘’하는 주인공 ‘리디아 타르’는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했다. 타르는 EGOT(에미상, 그래미상, 오스카상, 토니상)을 휩쓴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이며 비스포크 정장을 입고 다니고 자서전을 출간을 앞두고 있으며 유능한 개인비서도 뒀고 줄리어드 겸임교수로도 재직 중이다. 그의 커리어에 정점을 찍게 될 (헤어질 결심의 그!) 말러 5번 교향곡의 녹음을 앞두던 중, 예상치 못한 불안이 그를 엄습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동료이자 제자, 혹은 그보다 더 사적인 관계로 추정되는 크리스타로부터 집착에 가까운 메일을 지속적으로 받는다. 붉은 머리였던 크리스타는 꿈과 현실에 자꾸 침투하고 타르는 점점 신경증에 시달린다. 작곡가이자 지휘자로서는 치명적이게도 환청을 듣고 소음에 민감해진다. 결국 타르는 공식적으로 그루밍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 당하고 청문회에 불려다니며 연이은 폭로전에 휘말린다.
<타르>는 표면적으로 심리 스릴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환청과 악몽에 시달리고 불안한 이미지들을 영화 내에 아주 정교하게 배치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그의 몸과 마음은 점점 아파오고 실패의 그림자가 덮친다. 이 천재 음악가가 직면한 위기 앞에 관객도 덩달아 긴장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타르가 정확히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명확히 보여주지 않기에 이 영화를 어느정도 스릴러로서 즐길 수 있게 해준다. 타르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무너지고, 커리어가 ‘캔슬’ 당할까봐 두려워한다. 특정 인물의 부적절한 발언이나 행보로 그를 보이콧하거나 업계에서 퇴출시켜버리는 문화를 ‘캔슬 컬쳐’라고 한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스스로 자괴감을 느껴 신경증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 홀로 외롭게 늙고 병들어 벽에 똥칠하다 죽는 노인네가 되기 싫은 것 뿐이다. 후반부로 가면 관객은 점점 스릴러에서 벗어나게 된다.
영화를 보고 여러 칼럼을 찾아봤는데, 해외에서 비슷한 시기에 같이 개봉한 <그녀가 말했다>가 종종 같이 언급됐다. <그녀가 말했다>는 하비 와인스타인 피해자들의 미투 운동을 다룬 영화로, <타르>와 비슷한 주제의식을 공유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결정적으로 둘이 다른 부분은 시점이다. <그녀가 말했다>는 가해자의 잘못을 명백히 상정해놓은 상태에서 피해자들의 시점으로 투쟁과 연대를 보여준다. <타르>는 ‘가해자로 추정되는’ 사람의 시점을 이용해 관객에게 타르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여지를 주되 스스로 해석할 수 있게 논쟁의 장을을 마련해 영화가 더욱 입체적이고 여운이 남으며 세련됐다. 내가 미처 언급하지 못한 쫀쫀한 연출이 매우 돋보이는 영화긴 하나, 감독이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에 꽤 많은 것을 걸었다고도 보인다.
“창작자의 도덕성과 작품을 분리해서 봐야하는가”. 이는 영원한 논쟁 거리이며 영화 내에서도 직접적으로 언급이 된다. 영화를 보며 우리는 현실 속 ‘타르’들을 떠올리게 된다. 김기덕, 로만 폴란스키, 그 외에 2박 3일동안 줄줄 읊어도 모자를 수많은 가해자들. 영화에서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는 않지만, 하나 명확한 것은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타르가 연주하는 ‘음악’ 뿐 아니라 ‘타르’ 자체도 소비한다. 청중은 말러 5번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타르가 지휘하는’ 말러 5번을 듣고 싶어 한다. 연주회가 아닌 토크쇼라도 사람들은 타르를 보기 위해 간다. 그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음악관에 대해 설명한다. 음악에는 정해진 시간선이 있으며 지휘자는 그 시간선을 완벽히 이해하고 시작점을 짚어주는 시계와 같은 존재라고. 그래서 더욱이 작곡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구현해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말러 5번 교향곡을 이야기하며 말러의 ‘복잡한 결혼생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타르는 이렇게 창작자들의 배경에 지대한 관심과 이해를 갖는 동시에, 자기 입맛에 따라 선택적으로 무시한다. 스승과 대화를 나누며 ‘와이프 때린 거 말곤 다 괜찮았던’ 지휘자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다. 바흐의 여성혐오적인 행보 때문에 그의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 학생을 강단에 세워놓고 10분 넘게 조롱한다. 여성 음악가로서의 삶은 어떻냐는 질문에 ‘난 그런거 모른다. 요새는 성별 격차가 없다’고 단언하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어린 여성 음악가들을 멋대로 갖고 놀고 그들의 커리어를 들었다 놨다 한다.
타르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정체성도 한 몫 한다. 그는 숱한 헤테로 남성 사이에서 우뚝 선 레즈비언 지휘자다. 그렇지만 여전히 음악계에 팽배한 성차별에 무관심하고 오히려 본인이 그것을 주도하고 있기까지 한다. 본인도 성소수자이면서 팬젠더 학생에게는 일말의 공감도 하지 않는다. 이젠 권력의 꼭대기에 서있으니 소수자 정체성은 그다지 크게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단순히 지정 성별이나 성별 정체성의 여부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권력이라는 게 세상엔 자리하고 있다. 교차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창작자와 작품의 관계를 설명할 때도 단순히 도덕성만을 논하면 사회적인 것을 간과하게 된다. 영화계 성폭력, 문단 내 성폭력, 숱한 업계 내 성폭력들이 단순히 가해자의 미진한 젠더 감수성이나 도덕적 해이 뿐 아니라 업계 내 공공연히 존재하는 권력 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온전히 타르의 시점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관객은 사실상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타르는 내내 억울해하며 피해자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었다고 항변한다. 이 글을 쓰면서 계속 드는 생각은, 타르는 오만하고 위선적이며 모순적이고 싸가지 없고 지 멋에 취한 독단적이고, 그의 명성만 아니었다면 사회적으로 진작 매장당했을 새끼라는 것이다. 그는 어린 여성을 항상 옆에 끼고 살았다. 현 와이프는 오케스트라의 제1바이올린이고, 딱 두 장면의 힌트 뿐이지만 자신의 여성 비서와도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있다. 특히 젊은 여성 첼리스트랑 어떻게든 해보려고 껄떡대는 타르의 모습을 보면 아주 한심하기 그지 없다. 굳이 자기 작업실로 불러서 연습시키고, 첼리스트네 집까지 차로 데려다 주려 했을 때 그 친구가 일부러 ‘여기까지면 됐어요’라고 고사하고 정확한 주소가 아닌 곳에서 내리는 것도…. 요새 가끔가다 보이는 눈치없는 직장 내 고백 공격 상사 썰을 보는 것 같아 이마를 탁 짚었다.
사실 타르는 정말로 뭘 해보려는 생각까지는 없었을 수도 있다. 권력에 취한 새끼들은 그냥 ‘자기가 그 짓을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다. 습관처럼.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이 범죄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래서 영화의 전~중반부가 스릴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아무 잘못 안 했는데, 이지랄의 스탠스니까 자신을 조여오는 상황들이 억울한 거다. 누군가는 죄책감으로 인한 신경증적 증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커리어에 흠이 갈 것이라는 예감에 수반되는 증상으로 보인다. 적어도 내게는.
타르는 자신의 입으로 장 바티스트 륄리의 죽음에 대해 웃으며 말했지만, 정작 자기의 업보에 자기가 찔려 서서히 사회적 죽음을 맞이하는 걸 그다지 즐기지는 못했다. 영화 전체가 타르를 아주 세련된 어조로 비웃고 있다. 그가 저지른, 혹은 저지르지 않은 잘못 자체보다도, 오만하고 위선적이고 모순적인 태도에 관객들은 콧방귀가 절로 나올 것이다. 그리고 결말에서 폭발한다. 그의 모든 행보가 아주 뾰족한 지팡이가 되어 제 발등을 찍어버리는 꼴을 맞이하게 된다.
또 하나 재미있는 건 흔히 ‘마초 남성’에게 붙던 이미지를 리디아 타르에게 붙였다는 것이다. 그는 명예 남성이다. 젠더 수행을 호모소셜이 아닌 곳에서까지 수행해버린다. 해바라기 샤워기 밑에서 머리를 쓸어 넘기는 광공 샤워, 새벽에 뛰는 분노의 조깅, 일하다 제 분을 삭이지 못해 갑자기 복싱하러 가서 샌드백 치는 것 등… 너무나 마초적인 클리셰들이 아주 찰떡같이 붙여 풍자성이 짙어졌다는 느낌도 들었다.
영화는 거의 다큐에 가깝게 느껴진다. 케이트 블란쳇은 타르라는 허구의 인물을 살아있는 인간처럼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완벽하지 않음까지 완벽하게. 영화는 전반적으로 컷 전환을 최소화한 편집으로 그의 얼굴을 전면으로 비춘다. 덕분에 배우는 관객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 되는데, 오히려 관객이 연기를 의심할 틈조차 주지 않고 화면을 장악해버린다. 특히 영화 초반에는 타르의 모순적이고 위선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그가 누군가와 장황하게 대화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길게 리디아 타르를 비추고 그의 행동에는 자신감이 넘친다. 그러나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도리어 겸손하게 느껴진다. 분명히 계산했거나, 아예 ‘타르’라는 인물에 온전히 뛰어들어야 나올 수 있는 손짓, 턱짓, 어조. 특히 지휘를 하는 장면은 타르가 호감이든 비호감이든 빠져들어 볼 수 밖에 없다. 중간에 타르가 독일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지휘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감독의 의도인지 독일어 번역은 하나도 달려있지 않다. 그것마저 지휘와 음악의 일부처럼 들려 관객들이 홀린듯이 연주에 빠져들게 된다.
흔히들 ‘메소드 연기’하면 싸이코패스 살인마 연기나 우악스러운 역할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인데, 저정도로 과도하게 몰입한 연기야말로 메소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이 과잉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짜 그 사람처럼 보이게 하려면 난 대체 어디서부터 연기 연구를 시작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데 역시 대배우는 대배우구나 싶었다.
앞서 너무 미투 운동이나 권력형 성폭행, 오만한 타르에 대해 욕만 주구장창 늘어놓은 것 같은데, 쓰다보니 그 부분이 너무 길어진것 뿐, 오직 그것만 다루는 영화는 또 아니라 꼭 보셨으면 한다. 계층 상승의 욕망이라든가 사회적 자신을 구성해가는 과정이라든가, 아주 다층적이라 씹고 뜯고 맛보고 오랫동안 즐기는 맛이 있는 영화다.
리디아 타르는 아주 계산적이다. 지휘자가 시간을 통제하는 사람이라는 자신의 음악관에 맞게 통제광적인 면모도 보인다. 그가 간과한 것은, ‘음악’ 속 시간은 멈춰있어서 시계처럼 정확하게 짚어내기 좋으나, 현실의 시간은 계속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권력을 당연시하고 그 핀포인트에 머물기만 한다면 결국 각주구검해 추락하게 되는 건 예견된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우러러 볼만한 이름과 경력을 꾸리고 정치와 거래, 권력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해 서서히 ‘리디아 타르’라는 존재를 만들어낸다. 찌질한 면모를 비추는 연출들이 그를 인간답게 만들기도 한다. 다만 극 중간에 자가당착과 오만함 때문에 스스로 썩어 문드러져 사회적 죽음에 이르렀지만.
우리는 스캔들, 범죄, 부적절한 언행으로 자취를 감춘 셀럽들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 잘 안다. 잠깐이지만, 타르가 변호인단을 꾸려 ‘복귀 시나리오’도 짜는 장면이 잠깐 등장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리디아 타르의 추락이 아주 선형적이지만, 씁쓸하게도 엔딩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Lydia Tár will retu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