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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Oct 01. 2021

네가 너무 밉다

그리고 결국 너와의 두 번째 이별을 맞이했다.

네가 너무 밉다는 말이, 드디어 터져 나왔다. 너를 담담히 받아들여야 돌아올 것 같아 미루고 묻고 덮어뒀던 말을 이제야 꺼냈다. 네가 너무 밉다.


네가 너무 밉다. 영원을 말하고, 내 마음을 알고 있던 네가 밉다. 편지 한 통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려 다시금 봄이 찾아오던 나를 알면서, 너는 나의 겨울을 그렇게 두고 떠나갔다. 너도 겨울이 되어 떠나갔다.


첫 번째 이별을 하고, 1년 동안 한 발자국 내딛는 일을 하지 못해 신께 빌고 또 빌었다. 나는 이곳에 그대로 있을 테니, 제발 그를 내게 데려다 달라고. 우리가 인연이라면, 작은 생채기 정도는 감당할 수 있으니 제발 이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은 주지 말아 달라고, 아니, 인연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지금보다 더 아프고 힘들어도 괜찮으니, 제발 그를 내게 보내달라고 빌었다.


신은 응답하지 않았다. 저 멀리 스쳐가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짓이겨지고,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밀어내는 그를 보는 중에도 신은 결코 응답하지 않았다.


신이 미웠다. 왜. 왜. 왜.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거예요. 차라리 다른 시련을 주세요. 답을 알 수 있는 시련을 주세요. 적어도 눈은 뜰 수 있는 시련을 주세요. 제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무작정 파리로 떠났다. 버킷리스트라고 부르던 산티아고 순례를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파리에서 3일 동안 무얼 했는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매일 밤 잠에 들기 전, 이 여행을 끝내면 내게서 그가 완전히 사라지게 해 달라는 것을 빌고 또 빌었다.


걷기 시작했다. 비가 내렸고, 숲은 어두웠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눈을 뜰 수 조차 없이 퍼붓는 비에 발은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안개가 자욱한 정상에 올랐다. 오르막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내리막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지잉-' 안주머니에 넣어뒀던 핸드폰이 울렸다. 아. 1년을 기다린 그였다.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비에 젖은 몸은 모닥불이 필요했고, 이미 너에 젖은 마음은 어떤 것으로도 녹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걸어야만 했다.


이제야 용기를 낸 네가 미웠다. 그래서 너에게 빌었다. 나는 아직 너의 차가움이 생생해서 모든 게 아프다고, 제발 알량한 미안함으로 나에게 다시 상처를 주지 말아 달라고 신이 아닌 너에게 빌었다.


그러자 너도 내게 빌었다. 네 진심을 봐달라고, 결코 쉽지 않았으니 얼굴이라도 보여달라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내가 너를 붙잡던 그날의 대사가 네 입에서 나왔다.


너를 잊으려고 이 먼 나라까지 와서 800km를 걷기 시작했는데, 결국 나는 너를 향해 걷고 있었다.



남들은 평생에 한번 할까 말까 한 장거리 연애를 우리는 몇 번씩이나 해치웠고, 어쩔 땐 서로를 탓하고 어쩔 땐 각자를 탓했다. 그렇게 우리는 뜨겁고 치열한 연애를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너와의 두 번째 이별을 맞이했다.


그래서 네가 너무 밉다. 꺼져가던 불씨에 입김을 불어 다시 불을 살려낸 네가 밉다. 네가 살려놓은 불씨에 다시금 물을 뿌린 네가 밉다. 아니, 그런 너를 이번에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내가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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