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스스로 빛난다.
가끔은 삶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엉켜, 어설프게 나 자신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표출되고 말았던 날들. 그렇게 나를 붙잡고 살아온 끝에 돌아온 지금은 텅 빈 제자리다. 허무하고 쓸쓸한 마음, 세상은 어째서 이토록 불공평할까. 나도 나름대로 애썼는데, 왜 나만 늪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일까. 기대는 많았고, 그 기대만큼 상처도 많았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한국에도 금강산이 있어. 너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어."
그 말에 이끌려 나는, 아무런 기대 없이 설악산 울산바위를 조망할 수 있다는 금강산의 시작점 북설악 화암사로 향했다. 마음은 가라앉았고 몸은 무거웠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기대었던 마음을 이곳에서 떨쳐내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그런 내 마음을 다독이며 한 걸음씩 산길을 올라갔다.
비 온 뒤 뿌옇게 낀 안개는 고요한 화암사를 천천히 감싸고 있었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사찰 특유의 정갈함과 적막한 평온함이 흩어진 내 마음을 조용히 붙잡아 주는 듯했다. 무언가를 꼭 쥐고 살아온 손아귀에 허무가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토록 믿어왔던 것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이와 같지 않을까. 연등을 밝힌 불자들의 소원처럼 유난히 간절했던 내 마음들이 뿌연 안개가 되어 사라지는 듯했다.
화암사를 지나자 진짜 산행이 시작되었다. 가파른 오솔길, 준비되지 않은 다리에 찾아오는 숨 가쁨. 어찌나 힘이 들던지, 무작정 마음만 가지고 걷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돌이켜보면, 내 삶 전체에 두루 스며 있는 진실과도 같았다. 그런 나에게 속삭이듯 산이 물었다.
"정말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을 자신 있어? 그럼 넌 이제 뭘 붙잡고 싶은 건데?"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만 앞섰지, 쥐고 있는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나였다. 그저, 뭔가를 놓아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끌려오듯이 하며 왔을 뿐이었다. 산은 말이 없었지만, 그 질문은 내 걸음을 따라 조용히 이어졌다.
산 중턱을 오르던 중, 비에 젖은 버섯이 고약한 냄새를 퍼뜨리고 있었다. 크고 화려한 버섯이 밤새 비를 맞고 제 빛깔을 잃으며 나는 냄새였다. 그 모습을 보며 친구가 말했다.
"독버섯이 썩는 냄새야. 사람 시체 썩는 냄새랑 비슷하다네."
참으로 지독한 냄새였다. 한창 좋을 땐 예쁘고 탐스러웠을 버섯이었다. 하지만 속은 독을 품고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도 그런 경우가 있지 않던가.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는 아니었을까를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은 절망적이지만, 나 역시 고약한 어떤 마음으로 스스로를 포장하진 않았는지 속으로 물으며 걸어갔다.
정상이 가까워 올수록 점점 더 고요해지는 숲, 그러나 진한 냄새와 함께 마음에서 올라오는 불편한 진실들.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애써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산길을 걸으며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내 안의 미련까지 털어내고 비워냈다. 욕망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그 냄새처럼 스멀스멀 퍼졌다가, 이내 바람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금강산의 정상에 이르렀다. 구름이 흘러가고, 울산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진 그곳. 하늘과 땅이 맞닿은 듯한 그 풍경은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신비했다. 정말 너무 아름답고 멋진 풍경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설악산에서 주변을 바라볼 생각만 했지, 거꾸로 설악산을 마주하며 이토록 장엄한 풍경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기에 친구가 왜 나를 데려오고 싶어 했는지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저, 기대 없이 걸어온 산길 위에서 마주하게 되는 '지금 이 순간'을 함께 느끼고 싶었던 것이었음을.
그리고 그곳에서 친구와 나는 한참을 머물렀다. 큰 바위 끝자락에 앉아 저 멀리 흘러가는 구름에 그간에 조리던 마음들을 띄워 보내기도 했다. 또 마음껏 소리를 질러보기도 했다. '어느 순간, 이런 때가 오는구나!' 싶어 너무 행복했다. 새삼 삶의 진면목을 만난 것 같았다. 삶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때, 비로소 가장 깊은 곳을 보여준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더는 무엇에도 기대지 않을 때, 그 산은 나에게 삶의 또 다른 장면을 보여주었다.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이다. 산은 내게 말했다. 기대지 않아도 괜찮다고. 누군가의 인정, 어떤 성취, 비교 속에서 찾는 삶의 의미 같은 것들에 기대지 않아도, 존재는 스스로 빛난다고 말이다.
나는 이제야 조금씩 알아간다. 내 안의 독버섯을 마주한 것도, 허기진 마음을 끌어안은 것도, 모두 살아내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을. 세상이 여전히 공평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이제 안다. 내가 걷는 길에도 이토록 아름다운 구름이 스쳐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산 아래로 내려오며, 나는 비로소 나를 놓아주었다.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좋을 나를. 그리고 그렇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으로 또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