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마음 위로

걱정 대신 '작정'을 하면 어떨까.

by 마음키퍼

"마음에 스며든 걱정은,

아무도 모르게 비처럼 내렸다.”


밤 10시, 늦은 산책길에 만난 빗줄기는

갑작스러웠지만 어쩐지 반가웠다.

지나가는 비처럼 흘려보내고 싶은 감정들이

내 안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지난밤, 나는 그늘막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걱정 대신 ‘작정’이라는 마음을 꺼내 들었다.

오랜만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흠뻑 젖어 보았다.

그것도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선 그늘막 밑에서였다.




시간은 밤 10시가 넘었고, 반려견 보리도 함께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호수 위로

빗방울들이 바람과 함께 떨어지며 물살을 흔들었다.

그늘막을 타고 내려오는 빗줄기는

어느새 계곡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왱왱거리던 모기와 날벌레들은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조용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늘막 안까지

날아드는 빗방울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숨 돌리기엔 괜찮은 곳이었다.

작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보리와 나는 조용히 비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빗소리에 나도 모르게 젖어들었다.

태연하게 비 오는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

그 불빛 아래,

굵은 줄기의 비가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

그 빗줄기를 받아내며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보도블록까지.

이 모두가 이상할 정도로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늘막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사진출처:개인소장)

어렸을 적, 마루 끝 처마 밑으로

떨어지던 빗물을 바라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연의 소리를 억지로 들어야 했던 답답함,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체념,

그리고 지금 내 마음이 겹쳐졌다.

산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열대야를 식혀준 빗줄기가 한바탕 쏟아지고 난 후였다.

넘쳐날 듯한 물은 어느새 보도블록 사이로 다 스며들고,

촉촉이 젖은 나무와 풀이 더 우거져 보이던 그 길.

‘이제는 안 오겠지’ 하며 걸었던

호수길의 중간쯤에서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준비한 우산은 없었고,

13살 노견인 보리가 걱정되었다.

굵은 빗줄기를 맞으며 앞으로 30분을 더 걷기엔,

무리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쉬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이 비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내 예감을 믿어보기로.

걸어가는 이들도, 자전거를 탄 이들도

다들 자기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땀에 젖든, 비에 젖든 상관없다는 듯

앞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서두를 필요도 없다는 마음이

그늘막에서 잠시 쉬어가고 싶은 여유를 불러왔던 것 같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야외에서 비를 맞는 기분이.

얼떨결에 맞이했지만,

빗줄기에 씻겨져 내려가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르등에 비친 빗줄기(사진출처:개인소장)

내 안의 걱정들.

스스로 불러와 마음 곳곳을 떠다니며

희망을 꺾고, 절망을 키웠던 무수한 걱정들이

비와 함께 미끄러지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호수 위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서,

가로등 불빛을 따라 땅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따라서,

내 마음과 몸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을 따라서,

아파트 불빛을 닮은 마음의 등불을 따라서,

근심이 하나 둘 씻겨 내려갔다.

그때 영화 속 한 대사가 문득 떠올랐다.


“무엇이 중헌데?”

이렇게 비가 오는데,

이 비를 막아줄 우산조차 되어주지 못하는 걱정을

왜 내가 사서하고 있었을까.

걱정으로 놓쳐버린 내 아까운 시간들과,

예고 없이 내린 이 비 사이에 놓인 지금이

참 오묘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문득,

며칠 전 내가 스스로 내린 결론이 다시 떠올랐다.


‘걱정할 바에야, 차라리 작정하자.’

하고 싶은 일을 해내고자 작정하는 것.

그것이 지난 시간을 통과하며

내가 얻은 가장 단단한 문장이었다.

지난밤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부추겼다.

그것이 늦은 밤, 보리와 함께

산책을 나설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루 종일 ‘뭐라도 해야지’ 하며 자신을 채찍질했던 내가

결국 얻은 결론이라는 게 ‘작정’이라니.

하지만 작정하면, 뭐든 못 할 게 있을까?

괜한 충동이지만,

때로는 그것이 멋진 내가 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한다.


'작정'

이 한마디면 될 것을.

그게 뭐든

지금의 나를 바꿔나갈 힘도,

그렇게 내 안에서 찾았다.

그늘막 아래에는 우리 외에도 몇몇이 더 있었다.

비를 맞으며 걷던 노부부가 벤치로 들어와 앉았고,

어떤 이는 휴대폰을 보거나,

어떤 커플은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나도 있었다는 사실은

내가 잘하고 있다는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한 30여 분이 지났을까.

예상대로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졌다.

이제는 얇은 빗줄기가 보슬보슬 내리는 정도.

그 틈을 타 보리와 나는 다시 길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은, 출발보다 가벼웠고

마음까지 시원한 발걸음이었다.


에필로그

지난밤, 나는 알았다.

걱정을 붙잡고 사느라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는지를.

이제는 안다.

걱정이 아닌 작정을 품을 때,

비가 와도 나는 나를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화면사진출처: 개인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