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나에게 돌아가는 길

섬에 머물다, 평온을 만나다

by 마음키퍼

“모든 길은 나를 향해 있다.”

인생이란 긴 여행을 걷다 보면,

문득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잊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마음속 지도가 조용히 속삭인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그날의 출발은 분명 ‘선택’이었지만,

마음은 마지못한 이별처럼 무거웠다.

연초록이 번지던 5월의 어느 날, 나는

서해 최북단 백령도로 향했다. 2박 3일의 여정이었다.

초·중·고 학생들과 군인을 대상으로 한

약물 오남용 예방 교육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그 길은 ‘여행’이라는 이름의 작은 숨구멍이기도 했다.

멀고 고립된 섬.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답답함이 밀려오던 그곳을 향하던 아침,

하늘은 뜻밖에도 맑았다.

그래, 이건 가야만 하는 길이겠지.

백령도는 조용했다.

북한 장산곶이 맑은 날이면 손에 잡힐 듯 보인다는,

군사분계선과 가장 가까운 민간 거주지.

긴장과 고요가 나란히 숨 쉬는 풍경 속에서,

나는 처음 마주한 낯선 평온에 잠시 멈춰 섰다.

사곶해변의 단단한 모래는 내 발밑에서 묘한 안정을 주었고,

콩돌해변의 자갈들은 파도에 맞춰 차갑고 맑은 노래를 불렀다.

천안함 46 용사의 위령탑 앞에선 할 말을 잃었고,

두무진의 절벽은 아름다운 침묵으로 나를 맞이했다.

자연과 군사, 고요와 경계가 공존하는 이 섬.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미지들이

백령도에서는 오히려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상반된 매력이 백령도를 더욱 신비롭고

깊이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흘러가던 하루의 끝자락,

보건 선생님의 씁쓸한 표정이

마음 한구석을 자꾸 건드렸다.

작별 인사 속에 특별한 말은 없었지만,

그 눈빛은 말보다 큰 침묵으로 느껴졌다.

그 눈빛 속에는 어쩌면 교육 방식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함께 이야기하고 참여하는 시간이기를 바라셨던 건 아닐까.

준비된 내용을 단순히 전달하는 것보다는,

아이들과 ‘살아 숨 쉬는 수업’을 기대하셨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날 밤, 나는 수업에 변화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약물이라는 무거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설명 대신 ‘퀴즈’와 ‘상황극 이어가기’를 활용해

재미와 경각심을 동시에 불어넣기로 했다.


그 시도는 다행히 맞아떨어졌다.

아이들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였고,

그 반짝임 속에서 내가 전한 이야기가

서서히 열매 맺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호응과 박수 소리는 파도처럼 밀려와,

애쓴 내 마음을 다독였다.


‘참 잘했어.’

내 안의 작은 나에게 그렇게 말을 건넸다.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던 씁쓸함도,

그 박수 속에 천천히 녹아내렸다.

강의 일정이 어그러졌던 몇몇 군부대의 돌발 상황도,

이제는 더 이상 내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그렇게 모든 게 잘 흘러가고 있다고 믿은 순간,

배가 끊겼다.

돌아가야 할 날, 하늘은 불쑥 기분을 바꾸었고

안개와 강한 바람으로 인한 기상 악화로 육지의 배는 뜨지 않았다.

섬에서는 배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막연한 기다림.

내가 짜둔 일정은 거기서 멈춤을 맞이했다.

돌아갈 기대에 들떠 있었지만,

갈 곳은 없었다.


그날 밤, 바다는 말을 아꼈고 하늘은 긴 침묵으로 답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비는 이틀간 더 내릴 예정이라 했다.

그리고 정말로, 다음 날도 바다는 길을 열지 않았다.

삶이란 참, 미리 준비한 시간표대로 걸어가는 듯하다가도

바다가 길을 닫는 순간,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야만 하는 것임을 느꼈다.

결국 조용히 오늘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묵었던 호텔도 연장의 연장.

렌터카도 연장의 연장이었다.

결국, 2박 3일이 4박 5일로 늘어났다.

모든 비용과 계획은 3일 기준이었기에,

답답함과 걱정은 빠르게 번져 나갔다.

나에게서, 그리고 주변 지인들에게까지.

그러나 백령도 사람들은 달랐다.

“오늘 결항이라는데.”

그 말에는 아무런 감정의 흔들림이 없었다.

오랜 세월이 녹아든 익숙함과 체념, 그리고 수용이

그들의 일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그들에게 바다는 길이자 장벽이었다.

날씨는 늘 삶의 변수가 되었고,

배가 끊기면 모든 식자재, 물류 이송, 관광까지 모두 멈춰야 했다.

심지어 장병들의 휴가와 가족 면회까지도.

그 멈춤 속에서,

삶이 예측이 아닌 수용이라는 사실이 조용히 마음에 내려앉았다.

밤이 되자, 빗방울 머문 논 위로 개구리 소리가 퍼졌다.

호텔 창문을 열자, 그 단순한 울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문득 오래전 고향의 여름밤에 듣던 소리와도 같았다.

그리고 식당에서 포장해 온

따뜻한 육개장 한 그릇으로 마무리한 그날 밤,

개구리 소리와 뜨거운 국물 하나에도 사람이 위로받을 수 있다는

단순한 진실이 마음속에 잔잔히 스며들었다.

그 뜻밖의 멈춤 안에서,

진짜 삶의 결을 만난 듯 마음의 여유가 찾아왔다.

이렇게도 살아지는 고요한 시간 속 흐름에 스며드는 느낌.

그로부터 이틀 뒤,

바람이 잦아들고 드디어 배가 다시 떴다.


홀가분한 마음 안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오르면서도,

내 마음 한 자락은 여전히 섬에 남겨진 듯했다.

백령도는 이제 멀리 있지만,

오히려 떠나온 뒤에 더 가깝게 다가오는 섬이 되었다.

단절된 듯하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연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섬.

언젠가 당신도 그곳에 머무를 날이 올 것이다.

어쩌면 그때,

나처럼 ‘멈춤 속에서 시작된 진짜 이야기’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멈춤은 때로,

내가 원하지 않았던 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서,

나는 비로소 내 안의 나를 다시 만난다.


혼자인 줄 알았던 길 위에서

나를 끝까지 붙들어준 믿음.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 덕분에,

나는 두려움을 지나 사랑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안다.

길이 멀어질수록 사랑과 믿음은 오히려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넘어질 때마다 손 내미는 따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다시 시작할 용기는 충분하다는 것을.

결국 돌아가야 할 곳은

따뜻한 집도, 추억이 깃든 어릴 적 골목길도 아닌,

내가 진짜 나로 존재할 수 있는 마음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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