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5화 _ 말해봐, 나한테 왜 그랬어...? ]
"뭐, 뭡니까? 당신은...? 아...! 미야비씨가 지금 어디 계신지는 몰라도 잠시 후에 연락을 드릴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좀..."
"헛소리말고, 그 손부터 치우시죠!"
"뭐, 뭐요!?"
문득 과거의 추억이 떠올라서 인지, 아니면 생각지 못한 카와모토의 등장에 당황해서 였는 지.
예상과는 다르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아영에게 은근슬쩍, 감상적인 추억을 핑계 삼아 다가가려던 카와모토.
그 접근은 야마다의 차단의 손길에 의해 저지되었다.
아영의 앞에서는 늘 약하고 순종적인 자세만을 보여오던 야마다는 처음으로 거친 모습을 보이며 카와모토 앞에 마주섰다.
'자본금이 필요하다고, 너와 같은 일본인이 주축이 되어 벌이는 예술 그룹이라며...'
안톤에게 카와모토라는 존재에 대해 수차례 전해듣기는 했었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이 자가 나타났을 때 아영의 반응과 오고가는 거친 이야기들 등으로, 눈앞의 이 남자가 카와모토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어이, 카와모토!!"
"아...아? 어... 어떻게 날 알고 있지?! 당신... 누구야?!"
야마다의 외침에 아영 역시도 정신이 번쩍 든 듯 야마다 쪽을 쳐다보았다.
"카와모토...!! 어서 아영씨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해!!"
"무...무슨 소리야!! 당신은...미야비 씨... 대신해서 여기 나와있는 것 아냐?! 뭘 안다고 나서?! 아...아영, 너... 아는 사람이야!?"
조금의 흔들림 없이, 마치 자신과 아영의 관계를 모두 안다는 듯 이야기하는 야마다에게 카와모토는 서서히 두려움을 느끼가기 시작했다.
야마다는 아영에게 질문을 하는 카와모토를 가볍게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알겠다. 그러니까, 카와모토 당신이 오늘 아영씨를 만난 건, 다 예정이 되어 있는 일 이었어...!!"
아직까지도 눈앞에 닥친 이 상황이 어리둥절한지, 제 정신을 차리고 있지 못하던 아영도 갑작스런 야마다의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야마다, 그...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크리스랑 만난 게... 예정이 되어있는 일이었다고 ?"
"그 전에, 아영씨!"
"어, 엉?!"
아영의 앞에서 한번도 지어본 적이 없는 불만 가득한 굳은 표정을 하고 야마다가 다그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 지금 몇 년씩이나 찾아헤매던 놈을 바로 눈앞에 두고 그렇게 감상에 빠져있을 거야?! 내가 왜 전에 한번 물어본 적 있었지, 아영씨한테...!!"
"무...무슨...?"
"크리스라는 존재를 열심히 쫓고 있으면서도 가끔 왜 쫓고 있는지 몰라 보여 물었었잖아, 내가...! '크리스'라는 놈... 잡게되면 어떻게 할거냐고... 그 때 아영씨 뭐라 그랬어? 말해 뭐하냐고...잡으면 족치겠다고 했던 말... 기억해?"
"아..."
"근데, 분노해도 시원찮을 이 상황에서 어쩌자고 추억이 방울방울이야?!! 아영씨 지금 이러는 거, 나 엄청 불편한 거 알아?! 이제까지 같이 잡자고 열심히 찾아왔던 난 뭐가 되는 거야!?"
"......"
아영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날카로운 지적을 꽂아넣은 야마다.
처음부터 의도한 감정은 아니었지만 막상 전 남친의 얼굴을 맞이하자 잠시나마 감상에 젖었었던 아영은, 구구절절 옳은 야마다의 지적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지난 몇 년간, '인생의 목적'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만큼 인생에 깊이 들어와 있던 '크리스 추적' 이라는 과제.
어찌된 영문인지 아직 알길은 없지만, 지금 그 카와모토가 눈앞에 있다.
겪어본 적이 없던 야마다의 충격요법이 먹혀 들어간 건지, 잠시 가출했던 정신을 바로 잡으려 힘차게 고개를 양쪽으로 내저어보는 아영.
카와모토는 여전히 초조한 표정으로 아영과 아영을 강하게 다그치던 야마다를 번갈아 가며 지켜보았다.
피켓에 써있는 프랑스어를 보고 아는 척 했던 건데, 만나기로 했던 이는 보이지 않고 엉뚱하게 아영을 만나게 되다니.
솟구치는 불안한 기운을 애써 누르며 카와모토는 매달리듯 야마다에게 물었다.
"이...이봐!! 얘기를 해봐!! 당신... 미야비 상이 보낸 사람 아니야?! 그럼...어떻게 그 피켓을 들고 있는 거지...?"
"야마다 신스케...! 내 이름이다, 어디서 들어본 적 없나?!"
"야...야마다?... 무슨..."
이제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정체를 드러내려는 야마다.
가뜩이나 생겨난 다른 걱정에 신경을 쏟아오던 카와모토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야마다...야마...아... 안톤...!! 안톤이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래!! 제대로 기억하네...!! 나 역시도...! 네 동료 안톤 소개로 너네 자금 보태줬던 피해자다!!! 아무 말 안하고 있으니까, 모른 척 하려고 했냐?! 이름은 기억하면서, 돈을 갚아야겠다는 의무감 따위는 없는거냐?!"
"그... 그건... 안톤이...!"
"너희들 지금 같이 있지?! 빌려갔던 돈은 아마 해외에서 운영할 작업실이네 뭐네 해서 필요했던 돈 일 테고... 안톤도 네가 꼬신거잖아...! 네놈이 책임자 아니냐?!"
아영이 복잡한 감정 때문에 차마 하지 못했던 추궁까지도 다 알아서 해주는 야마다.
카와모토는 힐끗 아영의 눈치를 보고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순수하게!! 아티스트로서 자금이 필요했던 거야!! 떼어먹거나 그럴 생각따윈 없었어!! 프랑스에 가야만 했고, 그 때가 아니면 기회는 없었단 말이다!"
찌질한 놈...
내뱉어지는 구차한 변명에 아영이 다시 날카로운 눈을 희번덕 대며 공격하려 다가오는 순간,
야마다가 아영의 앞을 막아서며 찡끗 눈신호를 보낸 뒤, 카와모토에게 못다한 팩트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티스트? 웃기지 마!! 지금 네놈이 아티스트건 뭐건 상관없는데, 아영씬 네놈이 뭐하는 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어...!! 네가 떳떳하면 먼저 얘기를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그건..."
"왜? 그때는 성공해서 돈 돌려주겠다는 확신이 없었다는 식으로 얼버무릴 셈인가?! 그후에 결국 종적을 감춘 것도 같은 목적일 거 아냐?! 갚지 않을 생각으로...!"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시원하게 다 해주기라도 했는 지, 아영은 야마다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야마다는 아영의 그 미소를 확인하고 나서야 확신에 찬 얼굴로 다시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카와모토!! 너... 당연히 피해 다니는 입장에서 아영씨 만나러 온 건 아닐테고, 지금 들고있는 그 그림 팔러 온거지? 만난다는 사람 누구랬냐?"
"뭐, 뭐야, 당신 정말 미야비씨랑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던 거야?! 그, 근데 그 피켓은 어떻게..."
카와모토는 몹시 원통한 표정으로 혹시나 미야비라는 사람이 자신을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 지, 귀국장 전체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미야비'...랬지? 네 그림을 구입하겠다며 널 여기까지 오게 한 사람...!?"
야마다는 고개를 돌려 아영을 바라보며 이번에는 아영에게 물었다.
"아영씨, 아영씨 이름 한자로 어떻게 써?"
"응? 뜬금없이 이름 한자는 왜...우아할 아(雅)자에 꽃부리 영(英)자...아...앗?!"
별 생각없이 대답하던 아영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야마다...너 대체 한국말 공부를 얼마나 한거야...?"
"그래, 이제 알겠어? 아영씨 이름 '아'자 일본어 발음...! 물론 이름으로 잘 안쓰긴 하지만..."
한자어 雅 일본어의 훈독 발음은 '미야비'였다.
"뭐...뭐야!? 아영이가 미야비였다고?! 그...그럴리가... 그럼 나... 찾아내려고 직접 유인 한거야? 여기까지?! 어...어떻게 알고...!?"
"아니...! 미야비가 아영씨인건, 네놈이 여기서 말하는 거 듣고 알았던 거야!"
야마다는 의심하던 퍼즐의 조각들이 모두 맞추어 지기라도 한냥,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영과 카와모토를 번갈아 보며 이야기 했다.
"이게, 참... 여기까지 맞추면 정말 난 어디 무당 굿판에서 스카웃 제의 올까봐 망설여지는데 말야..."
"???"
"아마도... 이거...전체가 아영씨한테 프랑스 지인이라며 수상한 가이드까지 부탁했던 사람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싶어..."
"...!!! 세...세현이...!?!?"
***
늦은 새벽, 프랑스 아를.
세현과 때 아닌 야밤 산책을 즐긴 후, 각자의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
"아이, 씨...!"
꽤나 먼 거리를 걷고 와서 피곤할 법도 하건만, 머릿속에서 떠나지않는 이미지와 씨름을 하느라
해인은 영 잠이 오지 않았다.
모두 세현의 소설 때문.
당장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겨놓고 싶어 간질대는 손을 참느라 미칠 지경이었다.
"지난 번 단편 작업 때에도 이러더니... 이런 게...직업병...같은 건가..."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을 파악해야 돼, 먼저..!]
[부분적인 이미지에 집착하다 전체를 놓치지 마!]
머릿속으로는, 계속 진행되고 있는 소설 속 이미지가, 귓속에서는 가게 사장 아저씨가 일러준 충고가 하염없이 맴돌았다.
도저히 정리되지 않는 생각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어떻게 되었건 일단 연필을 손에 쥔 해인.
가까스로 그림으로 이어지려던 유혹을 떨치고 일러스트가 떠올랐던 장의 부분마다 메모만을 남겨놓기 시작했다.
빽빽한 메모로 가득했던 해인이 소장한 '그들만의 세상' 책처럼, 떠오르는 이미지의 러프한 안을 컨닝 글로서 남겨 두기 시작한 것.
점점 깨끗하게 프린트 되어 있던 세현 소설의 페이지들은 메모로 빼곡히 채워져가기 시작했다.
[ 삭삭삭...]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은 건너편 방 세현.
연필로 자신의 소설 출력본을 일일이 점검하며, 몇번이 끝일 지 모를 퇴고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완성도 완성이지만, 고치고 다시 점검하는 데에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건지, 이제 샐 수도 없을 지경.
이제 정말로 마지막 점검이었다.
며칠 후에는 출판사에 작품을 들고 찾아가 볼 생각에 매의 눈으로 종이가 뚫어질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두 사람의 위치와는 조금 떨어진 곳이지만, 해인과 함께 소설을 받았던 아저씨 역시 꼼꼼히 세현의 소설을 읽어가며 메모를 하고 있었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각 속, 같은 작업 중인 세 사람.
열정어린 세 사람의 작업은 시간 따위가 막을 수 없는 모양으로, 시간은 새벽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
[ 따르르르르릉!!!! ]
"아, 아...!!!"
거의 동이 터 올 때까지 소설을 손에서 놓지 못하던 세현.
그냥 책상에 앉은 채로 잠이 들어, 눈을 떴을 때는 출근 시간을 훌쩍 넘겨버린 시간이었다.
"아이고...!! 늦었네...늦었어...!!"
세현은 급하게 대충 채비를 하고는 집에서 나와 레스토랑을 향해 전력질주 했다.
이제는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듯한 경로를 요리조리 방향 전환해가며 이동했다.
빠르게 지나치는 사람과 사물들 틈에서 뭔가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띄었지만 무시한 채 지나치려는 찰나.
[턱!]
누군가 뛰고있던 세현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억!!!"
뛰어가던 속도의 반작용으로 목이 졸려진 세현, 순간 목이 턱 막혀왔다.
"콜록!! 콜록!! 아이, 씨...! 누구야?! 갑자기...!!"
"프랑스에서 한국말 쓰면 누가 알아듣냐...!? 누구긴 누구야?! 나지...왜 부르는데 대답도 없이 지나쳐?! 화장실 급하니?!"
졸렸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말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딱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은 다름아닌 해인이었다.
"어? 너... 지금 시간에 여기서 뭐해?! 너도 늦은 거야??"
"늦...었지...뭐 좀 하느라... 그래서 뒤늦게 가게 나가는 길이었는데, 사장님한테 전화왔어."
"어? 아저씨가? 뭐라셔?"
"오늘 일 있다고 가게 문 두 시간만 늦게 열자고, 틀림없이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셨어... 무슨 일 있으신가..."
"두 시간? 그럼 한 시간이나 더 남은 거네... 후...괜히 서둘렀네...!!"
그제서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안도하는 세현.
여유가 생긴 후에야 주변이 좀 자세하게 보이기 시작했는 지, 눈앞의 해인의 모습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해인이, 너..."
"어? 왜...?!"
"뒷머리 보니까 너도 급하게 나왔구나..."
"뭐? 아이 씨...!! 내린다고 신나게 내린건데 드라이기가 고장나서..."
자신의 뻗힌 뒷머리를 뒤늦게 인지해 힘주어 쓸어내리려 하고 있는 해인을 놀려대며 세현이 여유롭게 말했다.
"히힛, 어제 밤에 걷느라 피곤했을 텐데, 뭘 하느라고 잠을 설치셨어요, 그래...? 시간도 애매한데, 우리 먼저 문열고 들어가서 모닝 커피나 때립시다."
"그래, 근데... 임씨한테도 연락하셨을 줄 알았는데, 전혀 몰랐나보네."
"훗, 이제 아저씨가 나보다 네가 더 믿음이 가나 보다. 나는 뭐 나와서 기다리던 말던..."
"나랑 세트라고 생각하시니까 그런 거지, 주방 쪽 분들 께도 따로 연락하셨을 텐데 뭘..."
닫혀있는 가게 뒷문으로 들어가 주방에서 커피를 내려 익숙한 홀의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
소소하게 장난을 치며 대화를 나누던 가운데, 세현의 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리대기 시작했다.
"어? 이 시간에 누구지...? 설마 아저씨가 이제서야 전화를...?"
세현은 무심한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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