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7화 _ 단지, 널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 것 뿐이야...! ]
"이...이게 뭔데?"
도도하게 카와모토를 노려보며 야마다가 꺼내든 서류.
카와모토는 불안한 눈빛으로 야마다가 건내준 서류를 읽어갔다.
"돈 거래라는 게, 가까운 사이일수록 껄끄러운 법이지. 카와모토 네놈이랑 아영씨 관계처럼 말야... 부탁하기도 그렇고, 빌려주기도 그렇고...
언제까지 돌려달라고 증명서 같은 거 써두는 것도 좀 눈치 보이잖아... 왠지 먼 사이 같기도 하고..."
서류의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아 모두 살펴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류를 천천히 넘겨가며, 내용이 인지되어 갈수록 카와모토는 점점 초조함에 휩싸여갔다.
그저 자신도 알고 있는 같은 내용이 텍스트로 정리된 것을 확인했을 뿐인데, '법적인 효력'이라는 위협에 위축된건지.
“근데... 난 당신과 아영씨 관계하곤 다르지, 나랑 안톤은 외국에서 만난 그냥 ‘지인’일 뿐이니까 돈 거래 할 때에 차용증 작성해두는 건 당연한 거잖아...?
내가 이런 거 안만들었을 거라 생각했어?!? 외국인이라 절차가 좀 복잡하긴 하다지만... 어이, 그거 다 봤으면 이리 내놔!!"
서류를 손에 꽉 쥔 채, 놓지 않으려는 카와모토에게서 억지로 서류를 다시 빼앗아 조심스레 파일 안에 끼워두는 야마다.
카와모토 극도의 초조함에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그럼 이제까지는...”
“이제까지는, 안 찾고 뭐했냐고? 도망다니는 자국민 찾기도 이렇게 힘든데, 개인이 바다 건너 외국인을 찾는 게 쉽겠어?! 그래도, 결국 이렇게 당신을 찾았으니 이 서류는 분명히 큰 무기가 될 수 있겠지."
분노의 감정으로 열심히 찾아다니기만 했을 뿐, 다른 방법이 통 생각나지 않던 아영도 이제까지 공개한 적이 없던 야마다의 서류를 확인해보았다.
확실한 양식으로 쓰여진 차용증.
보증인에는 크리스를 포함한 작업실 5인이라고 적혀있었다.
‘아, 이래서 야마다가...’
문득 아영은 야마다를 처음 만나던 날이 떠올랐다.
밤늦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던 아영을 미행했던 야마다.
차용증을 쓰고 빌려주기는 했지만, 막상 잠적해버린 외국인에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던 차에, 보증인 중 일본인이라 들었던 ‘크리스’라는 인물을 조사하는 편이 더 빠르다고 생각했던 것.
“당신... 크...크리스 여자 친구...지!!!??”
...라고 물어오며 야마다는 아영에게 다가왔었다.
겪어보니 철저하기 그지없는 야마다와의 인연이 결국 이 상황에까지 이어질 줄, 그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지만...
“이것 봐!! 여기도 크리스라고 가명을 쓰기는 했지만, 이게 네놈이라는 걸 증명만 하면 게임은 끝난 거야...
보증인이 책임져야 하는 거 알지? 억울하면 안톤도 부르던가...”
카와모토는 식겁했다.
로망과도 같았던 프랑스 아를에서 작업실을 내어 같이 작업을 해나가자고 먼저 제안했던 것도 자신이요,
안톤이 돈을 빌릴 수 있다던 지인 야마다의 이야기를 했을 때 독촉을 했던 것도 자신이었다.
자칭 ‘예술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하는 카와모토의 머릿속에는오로지 ‘프랑스에서의 작품 활동’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었다.
어떻게해서든 프랑스에서 작업을 진행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길은 탄탄대로일 거라고...
‘잠시’ 빌렸던 돈 정도는 가뿐하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 장담했었다.
우격다짐으로 진행했던 그 프로젝트에서 그 짧은 기간에 느낄 수 있던 보람이란 그저 예술의 나라 프랑스의 공기를 맡으며 그림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정도였다.
계약했던 갤러리의 독촉과 이따금씩 발생하는 멤버간의 불화, 그리고 자신처럼 순수한 예술 열정을 가진 해인을 만나 끌어들여, 결국 지금의 모습이 되어버리고 만...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데 이럴 수는 없다고 카와모토는 부정해야만 했다.
“마...말했잖아!! 안톤과 난 아직... 준비가 덜 되어있을 뿐이라고!!! 돈을 떼어먹거나 한다는 생각 한적 없다고!!”
“예술 혼이라는 거... 이렇게 말도 안되는 핑계거리로 계속 사용 되도 되는 거냐?! 큰 돈 빌려줬던 나나 아영씨는 그럼, 네놈의 그 알량한 예술혼만 믿고 마냥 기다려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그... 그게 아니라...”
야마다는 빼도 박도 못할 근거와 무기를 들고 또박또박 논리를 펴나갔다.
여전히 분주한 공항 귀국장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그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 까.
그들의 장소에서 약간은 떨어진 입구 쪽에서는 무슨 일인지 제복을 입은 서너 명의 경찰들이 이들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별 다른 일 없이 그저 공항 내 치안을 위해 수시로 드나드는 보안관들일 수도 있을 것을, 제풀에 놀란 카와모토는 들고 온 그림도 내버려둔 채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이럴 순 없잖아...! 아직 아무것도 시작한 게 없는데...!!’
아영과 야마다를 보며 뒷걸음질로 서서히 움직이려던 카와모토는 이내 속도를 올리기 시작해, 급기야 뛰기 시작했다.
야마다와 아영은 갑작스런 카와모토의 도주에 당황하며 뒤를 쫓았다.
목적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정작 가지고 온 그림은 안중에도 없는 듯, 카와모토에게는 그저 지금의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것만이 최우선 과제인 듯 했다.
공항의 많은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때로는 밀치기도, 넘어지기도 해가며 전력을 다해 달렸다.
성큼성큼 긴 다리로 공항 한복판을 가로질러 출구에까지 다다른 카와모토.
정신없이 달려 나오던 중 자신의 핸드폰을 떨어뜨렸지만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가고 있는 길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아무 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문득 평화롭게 지내던 프랑스 아를에서의 생활들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하얀 캔버스에 스케치를 하고, 색을 입혀가는 그림의 과정들이 떠올랐다.
지금 이런 시끄러운 곳을 떠나 다시 아를의 작업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잠깐의 유혹에만 빠지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무작정 공항 밖으로 나온 카와모토는 택시 승차장에서 무차별로 택시를 잡아댔다.
“여기요, 여기...!!
대기 줄이 있는데 순서도 지키지 않고 무작정 택시를 잡아타려했던 카와모토를 밀치며 대기 승객들은 불만을 표출했다.
“이봐요!! 여기 대기 줄 안보여요?! 줄 서요, 줄!!”
그렇게 길게 이어진 승차장에서 어떻게 되었건 먼저 온 택시를 타려고 새치기를 해대던
카와모토는 결국 뒤늦게 쫓아온 경찰들의 무리에 의해 잡히고 말았다.
이곳저곳에서 무전으로 연락을 취해가며 배치되어 있던 그 구역의 경찰이 인상착의를 파악하고 카와모토를 잡아 포박한 모양이었다.
“이거 놔요!! 왜 죄 없는 사람을 이러고 잡는 거예요!! 빨리 안 놔요!!?”
잡은 경찰이 아직 어떤 체포의 이유도 먼저 밝히지 않았건만, 카와모토는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경찰보다도 뒤 늦게 카와모토를 쫓던 아영과 야마다도 경찰에 잡혀 끌려가고 있는 카와모토의 옆에 다다랐다.
“아영씨, 아영씨가... 신고...한 거야?”
“...그래... 다행히 네가 증거자료까지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놓칠 순 없잖아. 이번엔 내가 뭐라도 해봐야지...”
야마다는 힐끔 아영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분노로 살아온 몇 년간의 종지부.
과연 속이 시원할지 여부를 떠나 카와모토를 경찰에 직접 신고 했다는 건 아마도 꽤나 복잡 미묘한 심경이었을 것.
“이 사람이 맞습니까? 사기, 금품갈취에 도주하려고 했던 자가? 같이 가서 조사 하시죠.”
카와모토를 잡고 연행하려던 경찰이 아영에게 확인을 요구했다.
얼마나 난리를 피워댄 건지, 여전히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씩씩거리며 아영을 노려보고 있는 카와모토.
몇 년 동안이나 속앓이의 대상이었던 전 연인이 지금 눈앞에서 포박되어 거친 숨을 뿜어대고 있다.
사실은 아영이 그렇게 분노로 포효하고 싶은 심정이었거늘...
아영은 마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듯 오히려 딱한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일말의 정이 남아있을 때 상상하던 카와모토와의 재회 장면은 자신에게 무릎 꿇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반성하는 모습이었는데.
현실은 변명하고 기회를 보아 또 달아나려하고, 분해서 씩씩대는 모습 뿐이었다.
고작 이런 놈 때문에...
“잠깐만요.”
아영은 격하게 반항해대는 카와모토를 연행해 가는 경찰들을 잠시 멈춰 세워 카와모토의 앞에 섰다.
“카와모토... 아니, 난 크리스로 알고 있었으니까 마지막은 크리스라고 할게.”
아영은 카와모토의 손에 도망치다 떨어뜨린 핸드폰을 쥐어주며 말했다.
“이걸로... 시작했으니까 이걸로 끝내자... 왜 쓸데없이 나랑 찍은 사진은 아직도 배경화면으로 해놓고 앉았어? 아무 정도 안 남아있으면서... 그러면 좀 양심적일 것 같아 보였니? 내가 다 지워놨으니까 앞으로는 이런 걸로 누구랑 엮이지 마!"
급하게 도망치다 떨어뜨린 핸드폰을 발견해 주워두었던 아영.
휴대폰의 잠금 패턴도, 그대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던 배경화면 역시도 여전히 자신과 함께 있는 사진이었다.
5년여 전, 잃어버렸던 아영의 핸드폰을 주워서 시작되었던 카와모토와의 인연.
고스란히 만나기 전인 그 순간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에 아영은 그 잠깐의 사이, 자신에 관련된 모든 흔적을 없애버리고자 했다.
***
“흠...그래... 지금은...? 괜찮은 거야? 너...?”
“훗, 그럼 이보다 더 좋은 엔딩이 어디 있니? 뭐 이래저래 조사 같이 받다가 혼자 죽을 수는 없던지 안톤이란 놈까지 결국 소환한 모양이더라고.”
긴 스토리를 전화로 전달받은 세현.
여기까지 온 데에 진전을 도운 것은 뿌듯했지만, 아영의 기분을 이해하기에, 그렇게 깔끔한 기분만은 아니었다.
“아, 내 정신 좀 봐...그러고 보니 세현이 너 지금... 일하는 데 아냐? 해인이도 같이 있고... 해인이 화났겠다. 이렇게 오랫동안 혼자 둬서...”
“음? 아냐... 괜찮을 거야.”
“에?”
“야! 천아영!! 내가 그렇게 속 좁은 애 아니다, 뭐!”
전화기 너머로 소리를 꽥 지른 해인에 아영은 깜짝 놀랐다.
“아... 옆에서 하도 떽떽거려서 스피커폰으로 네 얘기 같이 들었어. 자기도 관련된 얘기라고 들어야 된다고 옆에서 난리를...악!!”
툭탁거리며 장난치는 세현과 해인의 애정 행각을 전화너머로 듣게 된 아영, 이내 입술을 비죽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쳇, 치고받고 사랑싸움은 남들 없는 데에서 좀 하고... 암튼 듣고 있다니... 여기에 얘기 해도 되겠네. 세현이도, 해인이도 고마워... 너희들 덕분에 몇 년 묵은 내 과업이 다 해소가 된 것 같아... 돈을 다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시원섭섭하네... 하핫...!”
“나야 말로 고맙지, 어디까지나 당신이 베풀어 준 거에 보답 차원이었으니까 너무 고마워하지 맙시다! 근데, 너도 지금 야마다라는 친구랑 같이 있는 거 아냐?”
“같이 있지... 이제 사업도 본격적으로 같이 해야 하는데, 이 자식 얼굴을 맨날 봐야 된다니,
살짝 겁이 나기기도 해...”
“아영씨...나 한국말 다 들려...악!!”
"오해하지마...이건 너네 같은 애정 행각 아니니까..! 아씨...저 자식...귀찮게 한국말은 배워가지고... 그래, 그럼 새로운 소식 있으면 다시 연락할께. 너무 오래 떠들었네...!!"
몇년을 걸친 아영과 카와모토 해프닝의 일단락.
바다 건너 멀고도 먼 거리에,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이 사건은 드디어 종결을 맺은 듯 했다.
해인이 이곳에 있게 된 후로 작업실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는데, 카와모토에, 안톤까지도 빠져있게 되었다니, 어떻게 돌아갈 지 대충은 짐작이 갔다.
[끼이이익...!]
"세현아...벌써 와 있니, 들...?"
몇 시간을 연기했던 가게 오픈 시간에 맞추어 문을 열고 뒤늦게 나타난 주인 아저씨.
무슨 일이 있던 건 지 눈이 쾡하니 풀려 피곤에 쩔은 듯한 모습이었다.
"에... 아저씨, 무슨 일 있으셨어요?! 얼굴빛이 좀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음...? 아, 별거 아냐...! 뭐 좀 바쁜 일이 생겨서..."
본격적으로 가게 오픈을 준비하는 세현과 해인.
연락을 받았던 주방 직원들도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
몇 달 전, 그들만의 세상 출판사에서는 공모전 수상식 일정까지 마친 후, 수상자들에게 따로 당부의 말이 전달되었었다.
“수상자 분들 모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세계적으로 치러져 어마어마한 규모로 진행되어 선발된 만큼, 작가님들의 실력은 검증이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수상자분들께는 저희 출판사의 후원으로 치러지는 한 번의 장편 소설 출간 기회가 주어집니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에서, 여러분들의 역량을 한 번 더 증명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수상자들에게도 당연히 전달되었을 이 메세지가, 세현에게는 새삼 더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진실이든, 아니든, 명백하게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며 출판사 명예에 흠집이 생긴 것은 자명했기에.
세현은 자기암시를 걸어왔고, 그것은 결국 꾸준히 준비해오던 자신의 작품에 사활을 거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작가의 아들, 그것도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은 작가의 아들로서, 부정하고 싶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창작의 욕구.
소위 ‘잘 나가는’ 직장을 그만 두어가며 선택했던 그 길의 초창기부터 쭉 구상해 와, 숱하게 훈련을 거쳐 다듬고 다듬어진 그 이야기는 세상에 나오는 데에 3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셀 수 없을 정도의 횟수로 수정, 퇴고 작업을 진행하며 완벽을 기하던 세현은 바로 어제, 완벽한 완성작으로서 집필을 마무리 했다.
"이 소설에서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이제 해인이 네 차례인 거 알지? 겸손할 필요 없으니 마음껏 실력 발휘 해줘!”
무려 그들만의 세상의 숨겨진 일러스트레이터였던 이필립씨의 지도로 하루하루 무서운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세현 소설의 일러스트레이터 해인.
이제는 자신들의 일이 되어버린 양, 후반 작업을 시작한 두 사람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세현은 출간통보를 위해 그들만의 세상 출판사에 방문했다.
“오래간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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