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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too Oct 17. 2019

현실과 가까운 만큼 위험할 수밖에...[조커] 감상평

인정할 수밖에 없는 뛰어난 영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신 착란을 보이며 어떠한 특정 목적을 이루려 움직이기보다 기분 가는데로 대로 행동하는 듯한 배트맨의 대표 빌런 조커.

예상했던 그대로 이 영화는 그 조커라는 빌런이 어떻게 악의 편에 서게 되었는가 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영화이다.

 스콜세지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 나 '코메디의 왕' 등 여러 영화 캐릭터를 참조하며 원작 코믹스대로만 따라가지는 않겠다 선언한 이 영화 조커는 다분히 문제작으로 불리기에 충분하다.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히어로 무비는 대부분 선과 악이 분명히 나뉘어 주인공인 히어로가 선의 편에 서서 정의와 평화를 수호한다는 골자를 지니게 마련으로,

빌런, 즉, 악의 편에 서서 주인공 히어로가 물리쳐야만 하는 이 대상에게는 반드시 악의 편에 서게 될 수밖에 없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존재해야 한다.

선과 악, 이렇게 단순하게 이분법으로 나누기엔 관객들은 이미 무수한 컨텐츠 안의 스토리텔링을 경험해 왔고 이제 별 이유 없이 무조건 히어로의 반대 노선에서 그저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빌런에게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현 시점에서 매력적인 악역이란 영화가 정의한 세계관 안에서 악의 편에 서게 된 이유나 명분이 합당하여 선한 역 측의 '평화 수호'라는 꽤나 오래된 명분과 대치를 해도 어느 쪽이 올바른 것인지 고민이 될 정도의 비중을 만들어주는 것이라 본다.
           

그런 측면에서 DC 코믹스의 배트맨 스토리 속 무수한 빌런들 중에서도 조커는 정말 오랜 기간 동안, 히어로만큼이나 매력적으로 그려지는 존재였다.

초능력도, 딱히 이렇다 할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가 이렇게 까지 오랜 기간 회자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아마도 의뭉스러운 이 캐릭터의 스토리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코믹스와 영화를 다른 세계관으로 놓고 해석해도 영화에서 풀어냈던 가장 유명한 이전 두가지 버전의 조커들.

영화를 지휘하는 감독의 연출이 영향을 미쳤음에도 관객들은 정말 매력적인 다른 버전의 조커를 만나볼 수 있었다.
 

스타일부터 가치관까지 전혀 다른 재해석으로 만들어냈던 잭 니콜슨와 히스레저의 조커. 꽤나 긴 시간차를 두고 만나볼 수 있었던 두 조커는 시대의 변화가 상징하는 큰 지점에서 발전을 해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감. 초기에는 코믹스를 실사 영화화함에 있어 얼마나 그 모습을 제대로 이식했는가를 중요시 했다면, 기술의 발전으로 다양한 실사 표현이 가능해지며 점점 코믹 북 속의 히어로는 현실의 모습에 편입이 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는 듯 했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안으로 히어로가 존재했다면...’ 하는 가정에서 출발 한 듯. 히어로를 현실에 녹여 들이는 현실성 여부가 개입되기 시작했다.

히어로를 다루는 영화가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현재에, 마치 코믹북 속 히어로의 실사 판은 현실에서 고민하는 가치관을 대변하는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 듯 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 가치관 반영은 히어로보다 오히려 현실의 시스템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정의를 내세우며 일상에 맞서려는 빌런 쪽에서 더 확고해야만 했다.
                                                                                            

이미 다크 나이트 영화 속 히스레저의 조커로부터도 시간이 꽤 흐른 것을 감안할 때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더한 현실성이 부여된 인물로 묘사되어진 듯하다.  


특히 안티 히어로의 역할로서 거의 완성된 악의 모습을 하고 등장하던 이전 조커들과는 달리 그야말로 “탄생” 그 자체에  포커싱을 두고 시작하는 만큼 보다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다루기에 이른다.

'연기의 신'이라 불리우며 이전에도 감정의 폭이 큰, 소위 센 캐릭터 연기들을 완벽하게 소화해 오던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 이기에 그 비참한 현실감이 더 몰입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영화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려 히어로 무비의 빌런이 주인공이며 그가 악으로의 각성하는 과정을 차례차례 따라가는 전개인 만큼 영화의 태도는 관객들에게 그의 악행의 이유에 대해 설득을 하려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미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 개봉 때의 현실 총격 테러를 떠올려보아도 이 영화의 위험성이란 충분히 경계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것이며, 이 영화 감상 후에는 사실 그때보다도 더한 위험이 느껴지는 영화라고 느낀 바 있다.

 보다 더 현실과 가까워진 거리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의 스토리

정신병 질환 병력, 아버지의 존재를 모르고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며 근근히 살아가는 사회 극빈층 아서 플렉. 그럼에도 사회생활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광대분장을 하고 행사장의 도우미와도 같은 광대 역할을 하지만 직장 안팎으로 무시와 멸시를 당하기 일쑤이다.

그럼에도 늘 웃음을 잃지 말라던 성장과정의 가르침대로 늘 세뇌를 당했던 그는 무의식중 누군가에게 웃음을 주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코메디언으로서의 꿈을 지니며 살아간다. 그러나 장애와 자존감 부족 등으로 일반적인 대화조차도 어렵교 일반적 공감 능력조차도 부족하던 그에게 코메디언으로의 꿈은 소원하기만 하다.

사회에서 가정에서 갖은 수모와 멸시를 받아오던 그의 분노는 비로소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해소되기 시작하고, 이제껏 모르고 당하고만 살았던, 남들과는 다른 정신세계 속에서 살아가던 그에게 무언가 알 수 없는 쾌감과 만족감으로 다가와 과격한 행동으로 이어가게 되며 그의 행동으로 인해 사회적 울분에 빠져있던 사회적 약자들이 들고 일어나 그를 추종하며 점차 폭력과 범죄, 폭동이 난무하는 범죄도시가 만들어지게 된다는 이야기.




앞서 언급한 바 있다시피 이제 히어로 무비의 캐릭터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비추어 진다.
 
극중 아서 플렉은 여러 가지의 불안정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을 상징할 수 있다. 극빈층에 정신적 장애인, 사회적 약자, 입양아, 서자, 소외계층...
 
영화에서는 조금 과할 정도로 그런 모든 설정을 가진 위에 철저하게 망가진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절망적인 모습을 꽤나 자극적으로 나열한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자존감은 당연히 그에게 하루하루 버티어 내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고 소원해 보이기만 한 그의 작은 꿈만이 유일하게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었다.                                                                                         

바로 많은 관중들 앞에서 농담을 통해 웃음을 주는 스탠딩 코메디언.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꿈조차도 자의로 생성된 것이 아닐 것이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영화 중후반부에 밝혀지는 그의 성장과정에서의 학대사실. 지속적인 학대를 받아오는 와중에도 그는 항상 웃음을 잃지 말라는... 어떤 세뇌와도 같은 지침을 억지로 지닌 채 성장해왔다.

현실은 웃을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데 웃음을 잃지 말라니.

웃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이 그저 그의 머릿속에 박혀있을 뿐, 제대로 된 경험과 학습을 받아보지 못한 그로서는 어떤 상황에서, 어떠한 타이밍에 사람들이 웃음이 터지는지 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가 지니고 있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병’과 대치되는 부분이다. 그에게 웃음이란 자연스런 공감대를 통한 행위가 아닌, 강박에 의해 마지못해 지어야만 하는 고통이었다.


영화는 이런 대치를 통해 그의 웃음이 일반인들의 웃음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시킨다.

“인생의 낙”

현대인들은 대부분 힘든 일상 속에서 잠시잠깐의 즐거움을 탐닉하려 하고, 말하자면 그 조금의 즐거움을 위해 힘든 보통의 날을 참으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중 아서플렉에게는 잠시 쉴 곳, 기대어 있을 대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힘들기만 한 보통의 나날들은 더한 무게로 그를 짓눌렀다.

병든 노모는 항상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서만 관심을 두었으며, 생계를 위한 직장 내외에서 그는 늘 멸시를 받고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분류되어버린 일상.

현재도 과거도 명확하지 않은 자신에게 있어 미래는 그저 아무 기대없이 맞이하는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그는 자신이 견디어 낼 수 없는 현실을 벗어나 혼자만의 망상에 심취할 수밖에 없었고 그가 망상 속에서 만들어낸 인물들과 실제의 인물들과의 괴리를 느끼는 순간마다 그는 더더욱 좌절을 느껴갔다.


기댈 곳을 찾아 헤매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

어머니가 집착했던 편지의 대상인 도시의 거부 토머스 웨인이 아버지일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졌을 때도,
즐겨보던 tv쇼의 진행자 머레이를 동경하여 그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질 때에도 그의 가슴 한편에는 희미하지만 절대 놓지 못하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작은 즐거움을 바라며 힘든 일상을 견디며 사는 일반인들처럼, 절망 가득했던 그의 일상에서 잠시나마 꿈꾸던 그 희망들이 산산조각이 나 버리는 순간이 바로 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던 악의 불씨에 불이 붙은 지점이라고 영화는 이야기 하고 있는 듯하다.

원래부터 악을 타고난 인물이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던 정신적 속박과 물리적인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져 완전한 악의 길로 들어섰다고 할지도 모른다.

                                                                              

길버트 그레이프

문득  영화 '파이터'나 '길버트 그레이프' 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옭아매던 굴레 때문에 자신을 찾지 못하던 주인공들이 일련의 사건과 계기를 통해 해방을 선언하고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다는 구성과도 닮아있음을 떠올렸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버려져 보호소에서 길러지다 입양을 통해 가족을 형성으며


학대당하고 세뇌당하며 그에게 보여지던 거짓과 위선 등은 그에게 악의 근원을 형성시켜 분출할 자신도 없 비참하기 그지없이 늘 참기만 하는 인생을 만들어 놓았지만,

각성의 계기가 된 어느 사건을 거치며 그는 어디서 부터 잘못되었는 지 모를 가족과, 존경과 배신의 감정으로 자신의 꿈을 현혹시키던 존재를 과감하게 정리기에 이른다.


단지 인정을 받고 싶었지만 아버지에게건, 존경하는 사람에게건, 직장이건... 그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가 어느 한 쪽의 거대한 존재로서 추앙받는 느낌.


공감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기에 이제 자신이 받게 된 이 관심과 인정이 어떠한 파장을 초래할지 인지하지 못함이었을지 아니면 그 자체로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 받아들여야겠다 생각한건지


늘 축쳐진 어깨로 무거운 나날을 버텨가던 그가 몸을 흔들며 추어대는 춤사위는 몹시  홀가분해 보인다.                                                                            


그가 인내하며 살아야 했던 시절,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망상’이라는 것은 한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그것은 망상증 환자라 진단 받았다던 어머니가 그에게 끼친 영향일 수도 있지만, 현재 힘든 그의 인생에서의 유일한 도피처라고 생각해 본다면 납득이 갈 수 있는 부분.

문제는 현실의 고통을 피하려 망상 속에 너무 심취해버린 나머지 망상과 현실의 경계를 인지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는 점이다.

누구에게건 호의를 받아본 적이 없던 그에게 일상적인 대화 한마디를 나누었을 뿐인 동네 이웃은 망상 속에서 애인으로 진화해버렸고, 즐겨보던 TV프로의 동경하던 MC는 그를 응원하며 용기를 북돋워 주는 아버지와 같은 자상한 인물로 변모해 버렸다.

그리고 그 망상 속 인물들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는 순간부터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와의 괴리감은 알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로서 그를 자극시킨 것.
                                                                                          

다른 영화나 이야기들 안에서도 무던히도 반복되어 온 한 인물의 각성과정.


사실상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무언가 완성의 모습이 되어가는 과정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히어로 비긴즈'의 형태를 취하지만 영화 조커에서는 그 끝이 악이라는 지점에서 여러가지 여운을 남긴다.


히어로의 관점, 즉 배트맨을 중심으로 했던 이전 시리즈에서의 토머스 웨인, 즉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는 범죄가 들끓는 고담이라는 도시에서 여러 사회 공헌을 하는
꽤나 의로운 재벌로 등장하지만

이 영화의 관점에서는 겉으로 보여지는 지위나 명예 등을 지키기 위해 결단코 떳떳하지 못했던 과거의 행적들을 감추려 은폐하고 누군가를 매수했을 지도 모른다는 이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로 다르게 보여질 수 있고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당한 쪽의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선을 위해 행했던 행동들 조차 반대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더군다나 극의 주인공 아서플렉이 망상증으로 이 모든 시선들 조차 그저 열등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힌 그만의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남겨둠으로서 영화는 조커의 캐릭터 만큼이나 그의 시선에서 보이는 모든 사건들을 모호하게 보여지도록 만든다.

걱정하며 총을 건내주는 동료, 상담센터에서의 상담사,
종반부의 정신병원 상담사 등...                                                                                         

등장한 여러 인물들과의 관계조차 현실인지 망상속 이미지였는 지 헷갈리게 하는 연출로 관객을 현혹시킨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사회약자들을 대변하는 듯한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는 모습은 아마도 영화의 영향력 면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 아닐 까 한다.




의도했던 범죄는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그가 중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던 지하철 안.

그는 그야말로 최악의 하루를 맞이하며 아픔을 꾹꾹 참아내며 있었거늘 우연히 마주한 한 불량 청년들의 행동에 얽혀들어가 그만 자신도 모를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역시나 우연이지만 그 청년들은 도시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웨인 기업에 근무하는 상위계층의 그룹.

자연스레 구도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심취해 있는 '질 안좋은 강자'와 열심히 살아가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불쌍한 약자'의 대립이라는 형태로 맞추어져 갔다.
                                                                                            

'울분과 분노로 가득차 있던 사회적 약자들을 대표해 건방진 상위 계층의 오만한 행동을 응징했다.'


아직까지도 최고의 히어로 무비라 칭해지는 다크나이트의 조커, 즉 히스레저가 연기했던 조커는 무수하게 자신이 세상의 부조리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사상, 가치관들을 떠벌임으로써 선동하여 사람들에게 내재된 악한 기운을 일깨우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조커 역의 호아킨 피닉스는 그저 자신의 몸으로 부조리를 겪어오다 터뜨려버린, 말하자면 의도치 못했던 단 한번의 행동으로 자신 안의 악을 발견하고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명백하게 사회적인 계급 차별을 견디어 오던 약자 계층의 무리들은 이 더러운 세상에 '용감히도' 먼저 반항을 시작한 듯한 아서플렉의 범죄에 감화된다.

그리하여 아서플렉 조커는 이 들에게 선구자. 종교 지도자와도 같은 어떤 정신적 지주가 되기에 이르고 그 광신도와도 같은 신드롬은 삽시간에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사회 문제에서 정치이념으로까지 넘어올 수 있는 철학.
과연 정당한 가치를 위해서는 남에게 폭력을 행사해도 옳은 것인가.

이는 거슬러 올라가 DC코믹스 원작 배트맨 캐릭터가 갖는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와도 연결이 되는 부분이 있다.

악에 편에 서있는 자들의 악행을 저지하려 역시 사회적 금기인 폭력으로 그들을 제압하는 아이러니.

이 매력적인 설정은 수십년간 시리즈 안에서 캐릭터를 재생산 해내며 시대의 달라지는 가치관을 반영해 왔다.

자연스레 상업적인 영화산업의 측면에서는 시리즈를 양산해 내었었고 꽤나 큰 호불호를 거치며 어떻게 보면


 본 영화 역시 스핀오프와도 같이 빌런을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프랜차이즈가 만들어진 셈일지도 모른다.
           

연출, 상징, 연기, 미장셴, 촬영 등...
모든 부분에서 훌륭하며 또다시 조커의 새로운 전설이 만들어졌다 생각할 정도의 좋은 전개로 상업적인 영화계에선 물론 시리즈로서의 전개를 꿈꿀 법 하지만,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시리즈가 아닌 한편의 완결성을 지닌 작품으로 종결지어졌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다.


그 단편으로의 완결성이  인정되어 히어로 무비 사상 초유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수상작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상업영화 속 너무나도 유명한 캐릭터가 진지한 사회문제를 맹점으로 현실에서 재해석된 느낌. 


폭력성이나 취향의 문제를 떠나 관객들에게 꽤나 흥미로운 영화적 경험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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