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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May 24. 2024

사망(1,2)

어떻게 더 나은 전문가가 될 것인가

사망     


재작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향년 98세. 당신의 이름은 ‘대운’이었다. 당신이 태어나던 당시에는 여자 아이도 남자 이름으로 지었기 때문에 친구분들도 남자 이름이 많았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 중에 조선의 소녀들을 강제로 차출해서 무슨 짓을 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아마도 경훈, 무남, 동척과 같은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하면 혹여나 일제의 강제 동원을 피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을 것이다. 


대전으로 내려가 대학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찾았다. 국군대전병원에서 군의관을 하던 시절 큰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할머니는 돌잔치 때 증손자를 보셨지만 아마 오래전에 잊었을 것이다. 반 년 전부터는 외삼촌 내외 말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기억은 사라지는 법이다. 나는 가끔 기억이 영혼에서 가장 무게가 많이 나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대학생인 큰아이가 학교 수업을 빠지고 왔기 때문에 결석계를 내면서 시체검안서를 학교에 제출했다. 사오 년 전 만 해도 의사소통이 됐지만 석 달 전부터 식사량이 줄면서 활동이 줄었고 한 달 전부터는 거의 누워지내다가 돌아가셨다. 사인은 노환. 인간은 모두 다르게 태어나지만 자연사의 과정은 모두 엇비슷하다. 외할머니 역시 그랬다. 


응급의학과 의사는 아마도 법의학자를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시신을 보는 사람일 것이다. 시체검안서 때문이다. 사이렌을 번쩍이면서 구급차가 도착한다. 뒷문이 열리고 구조사가 하얀 시트에 싸인 시신을 이동 카트에 싣고 소생실로 들어온다. 눈을 꼭 감은 창백한 얼굴. 기계적으로 엄지와 검지로 눈꺼풀을 벌려 동공을 확인하고 경동맥을 손가락으로 눌러 맥박을 확인한다. 심전도를 붙여 무수축 리듬이 나오는 걸 확인한 후에 따라온 보호자에게 사망했음을 설명하고 기록을 위해서 몇 가지를 물어본다. 

응급의학과 레지던트가 되면 윗년차가 반드시 가르쳐 주는 것 중에 하나가 임상적 죽음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서양의학이 보편화되기 전 한국의 마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동네 어르신 몇 명이 모여 공동으로 사망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 임상적 죽음을 확인하는 절차를 갈음했다고 한다.


유럽도 비슷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적어도 베살리우스가 1543년에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를 발표하기 전에는 인체의 실제 해부학적 구조에 관하여 아는 바가 없었으니 혈관을 촉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베살리우스가 저지른 끔찍한 사고를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베살리우스는 가족들의 요청으로 사망한 스페인 귀족을 부검하다가 심장이 뛰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살아 있는 사람을 부검한 것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유명한 해부학자도 사망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몰랐던 것이다. 분노한 가족들이 재판에 넘겼지만 정상이 참작돼 사형을 당하지는 않았다. 베살리우스는 죄를 씻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생을 마감했다. 그 누구라도 그의 입장이었다면 도저히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성이 장씨였어요?” 큰아이가 물었다. 

“아니. 이씨인데.”

“그럼 왜 상주 이름에 장씨로 돼 있어요?”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외할머니는 6.25전쟁이 터지기 전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신혼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돼 있던 남편은 혼자서 월북을 했다. 어머니가 너무 어렸을 적의 일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 채 이제껏 살아왔다. 


국민학생 시절 방학이 되면 형과 나는 거의 방학 내내 전주의 외가에서 지냈다. 대학생이었던 두 명의 외삼촌과 바이올린을 전공했던 이모는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진짜 열심히 놀아줬다. 죄송하게도 나는 내 조카들에게 바쁘다는 이유로 그러지 못했다. 집 근처에서 만화책과 비디오를 빌려 오고 풍년제과에서 여름에는 팥과 얼음이 수북한 팥빙수를 겨울에는 계피향이 가득한 달디단 단팥죽을 먹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어 자막만 있고 한글 자막이 없는 것들이 있었는데 일본어를 하시는 외할머니가 졸다가 깨면 가끔 번역을 해주시곤 했다. 

어린 내가 당시에 가장 궁금했던 건 이모와 외삼촌이 어머니와 성이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외할머니는 형사였던 분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세 명의 자녀를 나았지만 그리 행복한 결혼 생활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기억하는 유년은 끔찍했다. 거의 매일 욕설과 고성이 오가는 부부싸움. 폭력과 비명. 하지만 어머니가 가장 분노했던 건 새아버지가 어디에 가도 당신을 딸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KBS에서는 이산가족찾기를 생방송으로 방영했다. 십 만 건이 넘는 접수가 들어왔고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만났다. 그 시기에 어머니의 고모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버지를 만나고 싶지 않냐는 것이었다. 고모부가 매형을 만나려고 신청했는데 직계가 아니면 신청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니 반드시 어머니가 신청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거절했다. 

어머니가 중학생이었을 때 처음 보는 친척이 어머니를 만나러 온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고 건너서 들은 얘기라면서 생부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일본으로 같이 가면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거절했다. 현재의 고통은 견딜 수 있었지만 미래의 불확실함은 그럴 수 없었다.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였고 그곳의 삶이 훨씬 나을 거란 아무런 보장도 없었다. 


“증조 할머니가 두 번 결혼하셔서 그런 거야.”

큰 아이가 증조부에 대해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걱정이 됐지만 어느새 아이는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식탁 위에 놓여있던 클리어화일 속의 시체검안서를 들여다보았다.      


98세 여자환자는 한달 전부터 침상에서만 지냈고 일주일 전부터 식사량 줄다가 금일 반응 없어 내원함사인노환       


아마도 큰 아이는 증조할머니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결혼을 두 번 했다는 사실마저도 금세 잊힐 것이다. 내가 시체검안서에 기록한 노환으로 사망한 수많은 환자들 중에서 단 한 명의 삶도 떠올리지 못하듯 아이도 그럴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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