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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Jun 17. 2024

예후(미래1,2,3)

더 나은 전문가 

예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십 년 후의 의료 시장은 이렇게 변할 것이고 응급의학은 저렇게 변할 것이고 등등.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모르고 있고 앞으로도 절대 모를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미래도 존재한다. 지금 씨앗을 뿌리고 정성을 들이면 언젠가는 열매가 열릴 거라는 것. 그보다 더 분명한 미래도 있다. 아무것도 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내가 화상병원에 간 건 앞으로 화상이 촉망받는 분야가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전히 그렇지 못하다. 선진국이 될수록 화상 환자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시의 나는 배워야 한다는 의욕으로 불타고 있었고, 가르쳐줄 스승이 있었고, 성실한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응급의학과와 완전히 동떨어진 분야가 아니어서이기도 했다. 


의과대학 6년과 인턴을 포함한 전공의 5년, 도합 11년을 배우고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됐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지금도 가끔 후배들에게 국군대전병원 진료부장이 했던 말을 해주곤 한다. 전문의 면허는 운전면허와 같은 것이니 면허를 방금 딴 초보운전자처럼 조심조심 환자를 보라는 것이다. 전문의 면허는 현재 전문가이기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라 미래에 전문가가 되기 위해 받은 것이다.  


‘상상’에 등장했던 횡격막 파열 환자를 한 번 떠올려 보자. 한국에서라면 응급의학과에서 초기 처치를 하고 흉부외과나 일반외과로 연결해서 수술을 하겠지만 일본에서는 구급의학에서 초기 처치부터 수술까지 한다. 일본의 의사 양성 시스템이 한국과 전혀 다르기 때문인데, 이 얘기를 몇 년 전 한일학회에서 들었을 때 한국도 응급의학과가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질환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안내를 맡았던 일본 의사는 구급의학 9년차였다. 안과 응급을 좀 더 공부하기 위해서 수련 중이라고 했다. 

병원에 취직해서 2주 동안 중환자실 병동 외래 수술방에서 해야 일을 배웠다. 관찰 기간이 지나고 본격적으로 입원환자를 받기 시작한 첫 주에 체표면적 52%의 화상을 입은 이십 대 남자 환자가 입원했다. 내가 받은 첫 번째 중증 화상환자였다. 


“소변량이 조금 적은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파클랜드가 언제 끝나지?” 문경준이 아침 식사로 사온 김밥을 먹으면서 말했다. 

“오늘 두 시요.”

“좀 더 지켜보고 똑같으면 수액량을 늘려.” 


응급의학과와 화상은 역사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급속도로 발전했다. 단순한 우연은 아닌 것이 화상 역시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중증화상 환자의 생존률은 1950년대 이후로 급격하게 좋아졌다. 이를 가능케 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대량 수액 요법이다. 1930년 언더힐은 화상환자 상처의 물집 안에 있는 액체를 분석해서 혈장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화상환자들의 사망이 독성물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수분 손실(loss of fluid)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944년 룬드와 브로더(Lund and Browder)는 화상 체표면적을 쉽게 계산할 수 있는 도표를 제시했다. 지금까지도 화상체표면적을 측정할 때 사용하고 있다. 이후에 화상 체표면적에 따른 수액량을 구하는 여러 방식들이 연구되었고, 1968년 박스터는 ‘파클랜드 공식’이라고 알려진 계산법을 제시한다. 화상환자를 전문적으로 보는 의사들이 아니더라도 모두 알고 있는 공식이다. 

소변줄을 꼽고 중심정맥관을 넣고 드레싱을 하고 거기서 좀 더 나간다면 수액량을 계산해서 주는 것까지. 응급의학과 의사였다면 내 역할은 여기까지였을 것이다. 


“파클랜드 끝나면 수술 계획을 세워.”

내가 경준을 쳐다보았다. 

“한 달 동안 상처 절반을 줄이는 게 목표, 내일 수술방 들어가서 깊은 데는 에스카치고 카데바 덮어.”


화상학 교과서 <토탈번케어(total burn care)>에 실린 계산법에 따르면 위의 환자의 사망가능성은 체표면적 52에서 14를 뺀 38(%)이다. 좀 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으로 평가해도 30퍼센트 정도이다. 열 명 중에 서너명 정도가 사망하는 것이니 굉장히 높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위의 계산법은 나이, 기저질환, 흡입손상을 포함한 다른 동반손상과 상관없이 따진 것이기 때문에 20대이고 다른 기저질환과 동반손상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경험적으로는 20퍼센트 이하이다. 반대로 말기신부전인 60대였다면 훨씬 높은 사망률을 보일 것이다. 


응급의학과 시절엔 현재 상태를 설명하는 일은 많아도 예후를 설명하는 일은 많지 않다. 중증화상 환자는 다르다. 현재의 상태만으로 예후를 예측하는 건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급속도로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이기 전에는 통계가 아닌 감으로 예후를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찰스 디킨즈의 소설 <위대한 유산>의 한 장면. 드레스에 불이 붙어 화염에 휩싸인 노부인 미스 해비셤은 핍을 향해 달려간다. 핍은 자신이 입고 있던 두꺼운 외투와 방에 놓여있던 피로연 식탁의 커다란 식탁보를 끌어 내려 불붙은 미스 해비셤을 덮고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는 그녀와 한바탕 몸싸움을 벌인다. 이후에 신고를 받고 도착한 의사의 진찰 결과 그녀는 ‘심각한 화상을 입었지만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라’는 설명을 듣는다. 하지만 그 이후로 몇 주의 시간이 흐른 뒤 매형 조에게 미스 해비셤이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뼈와 가죽만 남은 채 누렇게 바랜 신부드레스를 입고 기괴하게 등장했던 미스 해비셤은 이렇게 사망한다. 실제로 작가가 화상 환자를 본 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치료 과정을 직접 봤거나 의사에게 자문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의사의 설명 때문이다. 


화상외과로 근무하던 초기에 체표면적 65퍼센트의 화상을 입은 72세 남자가 입원했다. 화상면적이 넓고 고령이었지만 다른 기저질환이 없었다. 보호자에게 사망 가능성에 대해 경고하지 않았다. 환자는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나빠졌고 두 차례 수술을 받은 뒤에도 계속 나빠져 결국 입원한 지 열흘만에 사망했다. 되짚어 보면 사망률을 대략적으로 추정해도 90퍼센트에 가까웠기 때문에 굉장히 운이 좋아야 생존이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중증화상에 대한 경험이 없던 나는 입원 초기 상태만 보고 판단하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의사 역시 환자처럼 믿고 싶은 것만을 믿을 때가 있다. 심각한 화상을 입었지만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설명했다, 미스 해비셤을 진찰한 의사처럼. 

그 환자 이후로는 중증화상 환자가 입원하면 보호자에게 대략적인 생존률을 숫자로 설명했다. 개인적인 성향일 수도 있지만 무조건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치료하는 것보다는 나빠질 가능성이 있는 걸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치료하는 게 낫다.  

여담이지만 소설 속에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진 않았지만 몸통과 양쪽 팔의 화상이라고 했을 때 미스 해비셤은 적게 잡아도 대략 30에서 40퍼센트 정도의 화상이었을 것이다. 고령이라는 요인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대량 수액요법의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수분부족이 간과돼 사망했을 가능성이 많다. 


화상 상처가 나아가는 과정은 비가 그친 후에 땅이 말라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시간이라는 햇빛이 비치면 편평한 곳은 금세 마르지만 깊은 웅덩이가 패인 곳은 여전히 물이 고여있다. 화상외과의는 그냥 두면 마를 땅과 웅덩이가 너무 깊어서 흙을 부어 메꿔줘야 하는 곳을 구분해야 한다. 드레싱만으로 나을 부위와 피부이식을 해야 할 부위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화상체표면적 50퍼센트를 덮으려면 나머지 50퍼센트의 피부로 덮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방식으로 치료하는 경우는 없다. 땅을 말리기 위해서 모든 곳에 흙을 덮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사람의 피부는 땅이 아니기 때문에 통증과 감염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카데바 피부를 이용한 드레싱은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한시적이지만(대개 2주 정도 유지한다) 효과적인 해결책이다. 내 환자 역시 카데바피부를 덮고 2주 후에 제거했고 이후에 상처가 삼분의 일로 줄어든 상태에서 두 차례 피부이식을 시행해서 모두 나았다. 


이보다 좀 더 극적인 경우도 있다. 체표면적 92퍼센트의 화상을 입은 30대 여자 환자이다. 이론적으로는 사망률이 78퍼센트이지만 경험적으로 거의 백퍼센트에 가깝다. 하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다르다. 화상을 입은 상황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화장실에 있는 모기를 잡기 위해 모기스프레이를 잔뜩 뿌린 후에 화장실 문을 닫는다. 이후에 변기에 앉아서 담배를 피려고 라이터를 켜는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전신에 화상을 입는다. 비슷한 경우로 전기모기채로 모기를 잡는 과정에서 같은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실제로 여름철에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사고이다. 스프레이에 있는 액화석유가스가 미세한 입자로 공중에 떠있는 상태에서 라이터나 전기 모기채 스파크에 의해서 불이 붙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런 방식으로 입는 화상은 범위는 넓지만 얕은 상처인 경우가 많아서(접촉시간이 매우 짧기 때문이다) 대부분 상처가 이식수술 없이도 나을 수 있다는 점이다. 웅덩이가 없는 편평한 땅을 말리는 것과 같다. 내 환자는 카데바 피부를 덮고 2주 후에 상처의 90퍼센트가 나았다. 한 달 즈음 됐을 때 퇴원했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어서 매번 해피엔딩만 있는 건 아니다. 체표면적 15퍼센트인 20대 환자가 입원 2주일째 갑자기 급성호흡곤란증후군으로 폐가 갑작스럽게 망가지면서 사망하기도 하고, 25퍼센트인 70대 환자가 다리 부위 상처에 피부이식을 한 지 열흘째 폐색전증으로 인한 심정지로 사망하기도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20대 환자는 얼굴 화상이 있어 흡입 손상 가능성이 높았으며, 70대 남자는 흡연력과 고혈압 약을 복용중이었다. 하지만 고위험군임을 알고 있다 한들 매번 완벽한 예방법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흡입손상은 여전히 효과적인 치료법이 없는 상태이고 폐색전증 예방을 위한 압박스타킹이 항상 가능하지는 않다, 다리 부위가 상처인 경우는 더더욱.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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