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닌데(27-1)

공연일지

by 생각의 변화

0321 꿈의 서막


매일 출근을 하는 차 안에서 연극의 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는 게 일상이 됐다. 전에는 후반부가 가물가물한 곳이 많았는데 리딩을 반복적으로 하고 동선을 그으니 요즘엔 그 부분도 잘 외워진다. 화요일에 운전을 하면서 연극의 앞부분 대사를 외워 나가는데 갑자기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순간이 왔다. 어, 무슨 대사였더라? 잠깐 생각을 하다가 다음으로 넘어갔는데 이후에도 몇 군데 더 기억이 가물가물한 곳이 있었다. 생각해 보니 월요일에 대중교통으로 출근을 하면서 대사 연습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루 연습을 빼먹어도 생각이 안 나는 부분이 있다니. 골프 연습을 하루를 빼먹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빼먹으면 골프채가 알고 사흘을 안 하면 동반자가 안다는 속담(?)이 있는데 연극은 하루를 안 하면 관객이 알고 이틀을 안 하면 관객들이 알고 사흘을 안 하면 모든 관객들이 알게 되는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 좀 무섭군. 어쩔 수 없이 공연이 끝날 때까지 계속 운전해서 출근해야겠네.


수요일 줌리딩 땐 처음부터 어머니 조련사 장면까지 했다. 하나의 인물 속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있다. 잘 쓴 작품일수록 입체적인 인물들이 등장하고 좋은 배우일수록 인물이 가지고 있는 입체적인 면을 잘 보여주어야 한다. <그게 아닌데>의 작품 속에서 조련사를 제외한 세 인물은 각각의 역할(의사, 형사, 어머니)이 가지고 있는 전형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만 표현해서는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낼 수 없다. 전형성만으로 만든 인물은 종이 인형과 같다. 내가 파악한 형사는 형사로서 집요한 면과 폭력적인 면이 있다. 밧줄로 내려치고 담뱃불로 손등을 지지고 조련사의 어리숙한 면을 이용해 협박을 하는 행동이 그렇다. 비록 끼워 맞추기식이긴 하지만 나름 논리적인 면도 있는 것 같다. 형사가 조련사를 취조하는 장면에서 이런 면이 잘 드러나는 것이 좋다. 형사가 취조를 치밀하고 전문가처럼 할수록 연극 초반은 미스터리처럼 보여진다. 준용은 리딩이 끝나고 나서 코미디보다는 미스터리나 스릴러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아마도 초반에 형사의 대사 분량이 많고 코미디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의 연기가 리딩만으로는 잘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어쨌거나 연극 초반이 미스터리보다는 코미디로 느껴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코미디에 약간의 미스터리가 있는 것처럼. 그리고 형사의 또 다른 면은 자기만의 유머감각과 나름의 신조(개똥철학이거나 명언 중독)가 있다는 것이다. 이건 첫 번째 등장할 때 잘 드러난다. 거울을 보며 눈빛 연기를 하고 섀도우 복싱을 하고 비둘기, 거위, 원숭이 흉내를 내는 모습에서 그런 면이 잘 드러난다. 나는 이 두 가지 면이 한 인물 안에 자연스럽게 공존하게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다. 폭력성을 강조하면 소리만 지르다가 끝나고, 유머러스하려고 하면 형사다운 면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선규와 은하는 리딩이 끝나고 나서 형사가 동네 아저씨같은 느낌이어서 취조를 하는 장면이 잘 살지 않는다고 했다. 요즘은 계속 형사와 아저씨 사이를 계속 오락가락하는 중이다.


목요일엔 H선배가 추천한 극장을 가보기로 했다. 서너 곳을 추천했지만 조건이 맞는 곳은 드림시어터 한 곳 뿐이었다. 원래는 드림시어터도 우리가 원하는 시기가 이미 예약돼 있다고 했지만 반나절이 지나서 오후에 대관이 가능하다는 문자가 왔다. 나중에 물어보니 6주짜리 계약을 했던 팀이 취소했다고 한다. 선규와 성복과 함께 방문했다. 드림시어터는 혜화역에서 가깝고 110석의 객석과 넓은 무대, 조명시설도 좋았다. 극장 입구 앞의 관객들 대기 공간이 넓은 것도 맘에 들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관료. 서울형 창작극장 사업에 참여한 극장이어서 50퍼센트 할인된 가격으로 대관이 가능했다. 25년 전에 대관했던 극장보다 여러 면에서 훨씬 좋은 극장인데도 대관료가 더 쌌다. 극장 대표는 우리 외에도 두 팀이나 보고 갔기 때문에 원하는 날짜에 공연을 하려면 계약을 빨리 결정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우리 셋은 다른 극장을 두 군데 더 둘러 보았지만 모든 조건이 드림시어터가 더 나았다. 결국 남은 건 다른 이들의 의견.


저녁에 단톡방에 성복이 찍은 사진을 올렸고 모두 만족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날 대표에게 성복이 계약을 하겠다고 했지만 앞서 봤던 팀 중에 하나가 계약을 하는 바람에 우리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11월 초였던 공연 날짜를 한 달 앞당겨서 하기로 했다. 기획인 세광이 계약금을 보내고 성복이 다음 날 계약서에 사인하면서 드디어 공연 장소가 정해졌다. 장소가 정해지니 자연스럽게 공연 날짜도 정해졌다. 드디어 진짜 연극을 한다는 사실이 실감이 난다. 드림시어터. 우리가 30년 혹은 누군가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갈망했던 꿈의 서막이 비로소 올라가게 된 것이다.


(계속)

작가의 이전글그게 아닌데(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