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닌데(26-2)

공연일지

by 생각의 변화

03014 또, 삼매경


연극을 보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누군가 이 연극은 배우 지춘성만이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얘길 했다. 당시에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는데 집에 와서 번뜩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의과대학 들어와서 연극 하다가 제적당해 다시 다른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결국 의사가 돼 극단을 이끌면서 희곡도 쓰고 연극도 만드는 사람. H 선배. 완전, 딱인데. 다음에는 H 선배를 주인공으로? 음, 한 번 써볼까.


공연장소를 정하면서 공연 시기를 정하다 보니 비록 아직 7, 8개월 정도가 남았지만 연극을 하게 된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기획이 등장한 것이다. 본인말로는 “뭐, 꼭 기획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라며 말끝을 흐렸지만 “돈도 필요하고 지원을 해줘야 할 일이 있으면 하겠다는 거죠.”라고 마무리를 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니 결국 ‘돈’과 ‘지원’을 하겠다는 것. 연극에 필요한 돈과 부수적인 지원을 챙기는 것이 기획의 일이니 세광의 말은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았지만 음주 운전을 하진 않았다”는 문장의 아주 건전하고 바람직한 변형 아닌가. 세광은 본인 한 명으론 부족할 것 같고 세 명 정도가 일을 분담해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세광이 합류하면서 93~96년까지 연출을 했던 이들이 모두 만나게 됐다.


토요일 연습할 장면은 여태껏 한 번도 만든 적이 없었던, 동료가 등장하는 장면과 극의 클라이막스 부분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나, 낙근, 선규는 마지막 코끼리 쇼 장면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선규는 은하의 티프가 구현해 준 영상이 맘에 쏙 드는 것 같다. 티프의 아이디어는 취조실 벽을 나무 벽 대신에 두터운 검은 커튼으로 만들고 코끼리 쇼 장면에서 검은 커튼이 열리면서 알록달록한 조명아래 붉은 스트라이프 무늬가 들어간 서커스 천막으로 변하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별로 어려울 것같지는 않지만 문제는 취조실의 테이블과 의자가 없어야 한다. 우리가 공연하는 극장이 달오름극장이나 명동예술극장이 아니므로 테이블을 올리거나 무대 뒤쪽으로 자동으로 이동시킬 수는 없다. 결국 조련사를 제외한 다른 배우들이 적당한 타이밍을 잡아서 옮기는 것. 선규는 조련사가 코끼리로 변신하는 동안 옮기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얘기를 하는 동안 성복이 왔고 준용이 조금 늦게 연습 장소에 나타났다. 아버지 간병을 해서인지 준용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선규는 동료를 맡은 준용에게 씬스틸러를 요구하면서 여러 가지 사투리 버전들에 대한 아이디어를 줬다. 준용도 그렇고 예전에 준용을 봤던 나와 성복의 생각도 그렇고 사투리버전으로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것보다는 좀 더 자연스러운 수다에서 자기도취에 빠지는 수다쟁이로 만드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은하가 오면서 드디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클라이막스 장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이 나와서 대화를 주고 받다가 결국 조련사는 불통의 현실에 폭발해서 좌절하며 코끼리가 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어려운 점은, 사실 테이블을 무대 중앙에 놓으면 생길 수 밖에 없는 문제인데, 다이나믹한 동선을 짜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청우 극단에서는 조련사를 탁자 밑으로 넣어서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는데 선규는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성복이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는 게 불가능했다. 거의 몸을 구겨 넣어야 하는 수준. 결국 다이나믹한 동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조련사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특히 형사) 좀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 근처 중국집에서 시켜 저녁을 먹고 열 시가 됐을 무렵 연습이 끝났다. 준용이 아버지 간병을 위해서 먼저 갔기 때문에 코끼리쇼 장면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드디어 대단원에 도달했다. 오늘 하루 종일 만든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돌렸다.


“그래도 결국 끝까지 했네.” 연습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와서 은하가 말한다.

“막상 돌리니 채 이십 분도 안 걸린 것 같아요. 관객들은 우리가 이렇게 만드는 것 모르겠죠?” 성복이 말한다.

“연극 안 했으면 나도 몰랐겠지” 내가 말한다. 끝까지 갔으니 이제 다시 처음부터.


의사: 왜 코끼리를 풀어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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