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닌데(26-1)

공연일지

by 생각의 변화

0314 또, 삼매경


저번 주에 이어서 이번 주도 공연 장소 얘기로 단톡방이 뜨거웠다. 의대강당은 커다란 강의실에 가깝고 더 이상 극장의 모습이 아니어서 적당하지 않았고 무악극장은 일요일 대관이 안 되기 때문에 주말 공연을 해야 하는 우리의 계획과 맞지 않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둘 모두 <그게 아닌데>를 올리기에 적당한 극장이 아니다. 연극의 장점 중에 하나는 생생한 현장감이다. 우리 연극이 취조실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거라면 관객들은 극장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취조실이라는 폐쇄된 공간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의대강당과 무악극장을 그렇게 만들긴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럴 이유가 없다. 대학로에 있는 수많은 소극장들은 굳이 꾸미지 않아도 원래 그런 느낌이다. 아마도 작가 또한 그런 수많은 소극장들을 의식하면서 작품을 썼을 것이다. 내 상상이지만 만약 대극장용으로 쓸 생각이었다면 취조실보다는 좀 더 넓은 공간을 선택했을 것이다. 재판정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전혀 현실 속의 공간이 아닌 걸 선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수요일에 줌리딩을 했다. 요즈음엔 매번 모든 인물들이 등장하는 뒷부분을 읽는다. 이번 주엔 준용이 줌리딩에 참가해서 동료가 나오는 장면을 먼저 했다. 선규는 준용이 목소리를 키운 건 좋지만 너무 변화가 없는 게 문제라고 했다. 낙근과 성복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 예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일종의 프레이징이 필요하다. 클래식 기타리스트 박규희는 프로와 아마추어 연주자의 차이 중에 하나는 멜로디와 반주를 구분해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클래식 기타는 오른손으로 두 가지 모두를 표현한다. 멜로디는 흐르고 반주는 은은하게 깔리도록). 이걸 배우의 관점에서 말하면 관객이 들어야 하는 핵심과 그걸 끌어내기 위한 부수적인 것들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낙근은 작은 목소리로 쭈뼛대면서 시작하다가 중요한 부분에서 목소리가 커지면서 신이 나서 떠들게 되는 방식을 택할 수도 있다고 했고 성복은 풀을 150킬로그람이나 먹는다는 코끼리에 대한 지식보다는 코끼리 우리에 누군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들리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동료가 나오는 장면을 다시 연습했고 준용은 응급수술을 받고 입원해 계신 아버지 간병을 하러 가야 한다며 양해를 구했다.


목요일엔 오전 진료를 마치고 성복을 만나 추천받은 극장에 들렀다. 인터넷서 본 걸로는 가장 괜찮을 것 같았던 R극장에 들렀다. 낙산공원 방향으로 안으로 들어가서 조금 오르막을 올라가면 있는 극장이었다. 객석이 100석인 점은 좋았지만 무대 깊이가 얕았다. 준용이 알려준 D극장은 혜화동 로터리 쪽으로 올라가서 서울대병원 방향 쪽으로 내려가는 곳에 있었다. 전반적으로 소극장 공유와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객석이 조금 더 적고, 무대 높이가 조금 더 낮고 조금 더 좁았다. 객석이 60석인 게 가장 약점이었다. 두 군데 극장을 보고 나니 연극을 보러 갈 때까지 세 시간 넘게 남았다. 성복과 대학로 주변을 조금 걷다보니 선규로부터 톡이 와 있었다. 연극반 선배인 H가 극장을 몇 군데 더 추천했다는 것이다. H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전설적인 인물이다. 선배들에게 전설로 들은 걸 정리해 보면, 70년대 후반에 의과대학을 들어와서 연극반을 했고 연극에 빠져 학업을 내팽겨치고 연극을 하다가 의과대학에서 제적을 당했다. 그는 다시 시험을 봐서 다른 의과대학에 합격했고 거기서 연극반을 또 만들었다. 지금은 수원에서 개업을 한 의사이면서 극단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냥 연극을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몇 년 전까지도 본인이 대본을 쓰고 직접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그는 내가 연출했던 두 작품을 모두 보러 왔다. <지킴이>는 당시 운영하던 극단의 스탭과 같이 왔고 <로미오와 줄리엣>은 본인이 만든 의과대학 연극반 후배들과 함께 왔다. 그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진짜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시점에 연극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인 의사를 꼽으라면 ‘우리’가 아니라 H가 단연 영순위일 것이다.


은하를 제외한 다섯 명이 명동예술극장에서 <삼매경>을 보았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보기 시작했는데 점점 연극에 빠져 들었다. 이 연극은 1991년에 공연한 <동승>에 출연해서 각종 상을 휩쓸었던 배우 지춘성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당시 지춘성은 25세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는 아이같은 외모와 목소리로 동승의 도념역을 맡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특징인 외모와 목소리가 일반적인 남자역을 맡기엔 핸디캡이라는 것이다. 연극 속의 내용으로 보건대 그 이후로 제대로 된 역을 맡지 못한 채 지냈던 것 같다. 이 연극은 연극 <동승>과 연극의 내용을 바꾸려는 지춘성의 상상과 욕망, 현실 세계와 연극이라는 가상세계를 넘나들면서 진행된다. 처음에는 무대 위에 펼쳐지는 장면들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극이 진행될수록 지춘성이라는 배우의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검열, 집착과 해탈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학생 때 겨우 4년 정도 연극을 한 나같은 아마추어들도 연극과 관련해서 부질없는 후회도 하고 이룰 수 없는 꿈도 꾸는데 36년이라는 시간이 넘게 연극을 한 배우라면 그런 후회와 집착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덧붙여 내가 <삼매경>에 공감을 하게 되는 건 꼭 연극을 해봤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반복해서 후회하고 상상 속에서 재구성하고 비현실적인 꿈도 꾸는 그런 순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극을 보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누군가 이 연극은 배우 지춘성만이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얘길 했다. 당시에는 나도 모르게 주억거렸는데 방금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갈 것 없다. 내 주변에 있다. 의과대학 들어와서 연극하다가 제적 당하고 그리고 다시 다른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결국 의사가 돼 극단을 이끌면서 희곡도 쓰고 연극도 만드는 사람. H 선배. 와! 완전 딱인데. 다음에는 H 선배를 주인공으로, 음, 한 번 써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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