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일지
0308 카이로스
한성대 입구 역에서 나와서 4백미터 정도를 걸어야 하는 극장이었다. 접근성이 아주 좋지는 않지만 큰 길가여서 찾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극장입구 계단이 조금 가파르긴 했지만 극장 자체는 맘에 들었다. 무대 나무 바닥이 만들어져 있었고 뒤쪽 포켓과 분장실이 우리 연극의 무대와 잘 맞아떨어졌다. 객석은 80석(겨울엔 70석)이어서 약간 아쉬웠지만 높이차가 있어서 관람객들이 보는데 불편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무대 앞쪽으로 너무 나오지만 않으면 맨 뒷줄에서도 배우의 발까지 보인다고 했다. 조명은 현재 있는 조명을 LED 조명으로 모두 바꿀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 연극 규모면 충분한 수준의 조명이었고 조명 설치 작업은 극장주와 상의를 해서 하면 될 것 같았다. 이 극장에서 제일 맘에 드는 건 극장주였다. 회색 패딩차림의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오기 전까지 상상하고 있던 연극과 담배에 쩔어있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자신도 극단에 소속된 배우라고 했다. 원래는 아는 교수님이 운영하던 극장이었는데 교수님이 공직으로 가시면서 겸직이 안 돼서 자신에게 양도한 거라고 했다. 잘 되냐고 농담처럼 물으니 너무 만족한다고 하면서 활짝 웃었다. 괜히 상대방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극장을 나와서 대학로 쪽으로 걸어갔다. 낙근은 삐걱거리는 무대 바닥이 우리 연극과 어울린다면서 좋아했다. 은하는 조금 애매한 표정이었고 예전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하면서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극을 해봤던 성복은 대체적으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우린 식당에 들어가 곱창구이와 술을 시켰다. 은하는 의사와 조련사의 의상에 대해서 얘기했다. 의사는 화이트 계열의 상의를 입고 포마드를 바르면 좋을 것같다고. 했고 조련사는 노랑과 빨강 같은 원색이 알록달록한 옷이 좋겟다고 했다. 낙근은 사이비 교주 같다면서 질색을 했지만 “오빠, 알고보면 의사도 약간 사이비 교주 같은 인물이잖아요. 화이트라고 다 같은 화이트 아니에요. 크림색 아이보리 많잖아요” 은하는 꿋꿋하게 흰색을 밀었다.
“무대 조명 의상 분장. 야, 할 게 너무 많다. 이제는 발 빼면 안 되겠지?” 은하가 말한다.
“그런 걸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게 연극을 하는 재미죠” 내가 대답한다.
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할 때 소극장 바닥에 아무것도 없는 시멘트 바닥이었던 것에 놀랐던 얘기를 한다. 열 살 넘게 어린 후배들과 연극을 하고 있던 나는 무척 당황했지만 마치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별 내색을 안 했던게 기억난다. 그거에 비하면 오늘 본 극장은 너무 양호한 상태인 것이다. 낙근은 우여곡절 끝에 <신이국기> 연출을 억지로 맡은, 엄밀하게는 빼앗은 얘기를 한다. 은하는 <라생문> 연출을 할 때의 기억이 완전히 삭제됐다고 얘기한다. 신기하게도 자신이 연출을 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내 생각에 아마 <신이국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연극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연출을 하지 않았다면 성복도 연극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준용은 자신이 추천받은 극장을 단톡방에 올린다. 목요일에 들를 극장이 하나 더 늘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하기 전에 여수에서 공보의를 하고 있던 낙근을 만나러 갔다. 임상순이 교통사고로 죽고 일년이 조금 더 지나서였던 것 같다. 같이 연극을 하자고 했는데 사실 내 요구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여수의 집에 가보니 형수님과 방바닥을 기어다니는 큰 아들이 있었다. 그 아이가 올해 결혼을 한다고 한다. 사계절은 우리 기억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리고 갓난쟁이들은 어느새 자라서 결혼을 한다. 누군가는 20대는 시속 20킬로미터, 50대는 시속 50킬로미터로 시간이 흘러간다고 한다. 20대에는 모든 순간에서 시간이 넘쳐 흘렀는데 지금은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작년 9월에 시작한 연극 연습은 어느새 5개월이 지나고 있다. 하지만 억울해 하지는 말자. <모스크바의 신사>에서 로스토프는 이렇게 말한다. “일종의 우주적 평형이지. 아마 시간 경험의 총합은 일정할 거야. 그러니 우리 아이들이 이 특별한 6월 어느 날의 생생한 인상을 더 많이 간직할 수 있도록 우린 우리 몫을 포기해야만 해.”
이십 대의 시간은 지금도 느리게 흘러가고 있다. K를 만났던 그 시절은 아직도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느리게 흘러가고 있고 연극반과 임상순과 내가 출연하고 만들었던 연극들 <신이국기> <라생문> <지킴이> <로미오와 줄리엣>도 뇌의 주름들을 하나씩 더듬으며 느리게 흘러가고 있다. 50대인 누군가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아닌 것 같다. <그게 아닌데>를 시작한 후로 내 시간이 조금씩 느려지고 있다. 물론 시속 20킬로미터 정도는 아니지만 49, 48, 40 정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