랠프 앨리슨 : 보이지 않는 인간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출간한 것은 1978년의 일이었다. 그의 오리엔탈리즘은 단순히 ‘동양주의’를 뜻하는 신조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동양에 대한 서구의 그릇된 사고와 지배방식을 비판하기 위한 표제어였다. 그는 서양이 동양을 단지 타자(他者)로, 서구보다 열등한 것으로, 동양인들을 자신들의 숨어있는 자아---잔인하고, 색정적이며, 타락하고 게으른---의 대리인으로 치부하는 것을 거부한다. 서양인들이 동양을 이국적이고 신비하며 매혹적인 환상의 땅으로 허구화함으로써 동양인들을 독립적 개인이 아닌 ‘익명의 집단’으로 여기고 있음을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랍적’이나 ‘아랍인들’이라는 단어가 배타성, 엄격함, 그리고 집단적 일관성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그것이 나름의 삶의 역사를 가진 개별적인 아랍인들의 흔적을 덮어버린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에드워드 사이드)
민족주의나 국수적 사고에서 보면 타민족이나 이교도들은 모두 ‘타자’의 동양적 표현인 ‘오랑캐’ 들일뿐이다. 사실 우리 자신도 ‘일본인’, ‘중국인’을 비하하는 ‘쪽발이’나 ‘떼 놈’이라는 속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개별적인 한 사람이 아니고 집단적인 이미지에서 나오는 편견에 불과하다. 사실 이러한 집단적 표상의 오류는 한 민족, 국가, 사회 안에 함께 살아가는 개별적 인간에 대해서도 적용되기 일쑤다. 미국 사회에 아직도 남아있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같이 인종적인 것에서부터 ‘못 갖은 자’, ‘열등한 자’,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 등 개인에 대한 조소와 경멸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불평등과 편견의 벽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흑인 작가 랠프 엘리슨(Ralph Ellison)의 ‘보이지 않는 인간’(Invisible Man)은 이러한 의미에서 단지 흑인의 저항의식을 묘사한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을 상실한 한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그저 ‘보이지 않는 인간’ 일뿐이다. 중세의 도덕극 가운데 ‘에브리맨’(Everyman)이라는 작품이 있다.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에브리맨’에게 어느 날 ‘죽음’(Death)이라는 손님이 찾아와 긴 여행을 함께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죽을 운명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미국의 극작가 엘머 라이스(Elmer Rice)의 작품 ‘계산기’(The Adding Machine, 1923)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미스터 제로’(Mr. Zero)였다.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인간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인간’은 모든 이에게서 소외되고 버려진 한 인간에 대한 비극적 알레고리였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내가 그렇게 된 것은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흑인 대학생이던 주인공은 할렘 가(街) 근처에 있는 백인 전용 건물 지하에서 홀로 살아간다. 그는 척박한 공간 속에서 자신이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되어버린 과정을 더듬는다. 한 때는 평범한 젊은이의 활기찬 삶을 살았고, 사회라는 집단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도 했으며 타인과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할렘 가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만든 조직에서 그는 그를 반대하는 다른 흑인들에 의해 쫓겨난다. 적대감과 소외감으로 움츠러든 그는 할렘 가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백인들을 피해 어두운 터널에 빠지게 되었고 그곳이 그가 살고 있는 지하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인간’들이다.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을 봉쇄당한 채 어둠 속에 침잠해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름도, 얼굴도 없는 존재들 일지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52년에 나온 이 작품은 2차 대전 이후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던 서구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현대의 소통 부재와 그에 따르는 인간의 깊은 소외감과 불안감을 드러낸다. 그러한 감정은 시대와 관계 없는 인간들의 숙명적 사슬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