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문학작품들이 성과 성적 욕구를 다루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리지스트라타’(Lysistrata)로 시작해서 영문학의 역사에서만 보더라도 영국 근대소설의 개척자라 불리는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0-1731)의 ‘몰 플랜더스’(Moll Flanders),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의 시집 ‘풀잎’(Leaves of Grass), 러시아 출신 미국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 1899~1977)의 ‘롤리타’(Lolita), 미국의 흑인 여성 작가 마야 안젤루(Maya Angelou, 1928~2014)의 ‘나는 왜 새장 속의 새가 노래하는지를 알고 있다’(I Know Why the Caged Bird Sings), 랠프 엘리슨(Ralph Ellison, 1914~1994)의 ‘보이지 않는 사람’(Invisible Man), J. D. 샐린저(J. D. Salinger, 1919~2010)의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 D. H. 로렌스(D. H. Lawrence, 1885~1930)의 ‘사랑에 빠진 여인들’(Women in Love)과 같은 작품들은 성과 성애의 묘사로 사회와 독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들은 모두 출판이 금지되거나 청소년들의 독서 목록에서 빠져있었다. 안젤루의 작품 속에는 강간에 대한 ‘너무도 솔직한’ 표현들이 들어있었고, 드포의 소설 속에는 음란한 난교(亂交)가, 로렌스의 소설 속에는 ‘너무도 적나라한’ 성행위가 묘사되어 있었으며 블라디미르는 유아 성애(乳兒性愛)를 다루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성(sex)은 육체적 행위를 넘어 성적 욕구와 관련된 다양한 감정의 표현이며 인간의 삶에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자손 번식의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성과 성적 욕구였다. 모든 건강한 사람들은 성적 충동과 욕구를 갖게 마련이고 성의 환상과 성적인 관계는 인간의 정체성을 가장 극명하게 설명하기도 한다.
문학은 인간과 삶의 거울이므로 필연적으로 성과 성욕을 다루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방식과 범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어왔다. 번식에 대한 욕구는 분명 섹스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지만 그것이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다. 성적 욕구는 행위로 옮겨지지 않고 다만 느끼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것이지만 동시에 불순한 것으로 여겨졌다. 창의력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죄의식의 시작이기도 하였고, 삶의 가장 큰 쾌락이면서 동시에 고통이기도 하였다.
서양 문명의 초기에서부터 성에 대한 이야기는 커다란 논란거리였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이성(理性)과 성욕(性慾)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은 섹스 자체를 수치스러운 것이나 혹은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강력한 성적 에너지가 다산(多産)과 집단의 문화 그리고 개인적 영성(靈性)에 어떤 힘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 섹스는 사회적 질서를 파괴하는 경우에 있어서만 ‘문제’ 일뿐이었던 것이다. 재산이나 다름없었던 남의 여자를 탐하는 경우나 상류 계급의 남자가 하층 계급 남자와의 동성애적 행위에서 복종적 위치에 놓이는 경우 등에서만 섹스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초기의 기독교 교회는 섹스와 성욕에 대해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금욕을 삶의 순수한 가치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반면 유대교의 경우에는 성욕을 본질적으로 악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아 결혼 생활 내에서의 섹스는 선으로 보았던 것이다.
서기 1세기부터 사도 바울과 같은 초기 기독교인들은 결혼 생활 안에서의 섹스조차도 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죄악으로 규정하였다. 4세기의 성 오거스틴(St. Augustine)은 독신주의를 찬양하여 자신이 한 때 겪었던 이교적 삶에 강한 죄의식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섹스가 오염되고, 부패하고, 더러운 것이라는 생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문학에서도 성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빈번히 묘사된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리어 왕’(King Lear)에서는 성욕에 빠진 남자들을 결국은 몰락하고 말 어리석은 존재로 묘사한다. 토머스 하디(Thomas Hardy, 1840~1928)의 ‘무명의 주드’(Jude the Obscure)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수 브라이드헤드(Sue Bridehead)는 성행위를 파멸에 이르는 길로 여겨 자신과 주드의 성행위가 결국 비극적 결말을 초래한 것으로 믿는다.
반면 그와 반대로 섹스를 긍정적이고 유용한 것으로 보아 야망과 초월, 시련에 대한 극복의 상징으로 보는 문학작품들도 존재한다. ‘리지스트라타’의 경우 여성들은 섹스가 평화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남성들의 쾌락을 위한 성욕을 이용해 여성들은 남편들과의 잠자리를 거부함으로써 전쟁을 막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에서 요정의 왕인 오베론(Oberon)은 마법의 힘으로 왕비 티타니아(Titania)로 하여금 괴물로 변한 보텀(Bottom)이라는 인물과 동침하게 함으로써 욕정에 굴복한 섹스는 파괴적이지만 결혼 생활 내에서의 섹스는 선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마찬가지로 로렌스의 ‘사랑에 빠진 여인들’에서는 루퍼트(Rupert)와 ‘우르슬라’(Ursula)의 성적 관계를 두 연인을 결합하는 이상적인 관계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성과 성적 관계를 솔직하게 그려낸 로렌스의 여러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무지개’(The Rainbow), ‘채털리 부인의 사랑’(Lady Chatterley’s Lover), ‘아들과 연인들’(Sons and Lovers) 등은 모두 인간의 삶에서 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다. 로렌스는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성-심리학적(psychosexual) 이론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모든 성인의 신경체계는 어린 시절의 성적 관심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유아 단계에서부터 본능적으로 성적 욕구를 갖게 되며 이러한 성적 관심은 성적 대상의 변화와 함께 일련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어떤 한 단계에 고착되면 성인이 되어 심리적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 희곡 작가 소포클레스(Sophocles)의 ‘오이디푸스 왕’(Oedipus the King)’이라는 작품을 차용해 어머니를 성적 대상으로 고착한 심리 상태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20세기 내내 커다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인격의 형성에 미치는 다른 요소들을 배제하고 오로지 ‘성’(sex)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며 페미니스트들은 그의 이론이 지나치게 남성의 성적 욕구만을 다루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 욕구가 인격의 형성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프로이트의 생각은 성과 성욕에 대한 현대의 논쟁에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lult, 1926~1984)는 자신의 저서 ‘성애의 역사’(The History of Sexuality)에서 성적 담론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그는 서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성에 대한 이야기가 제한되어 왔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푸코는 19세기 이래로 성에 대한 담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말한다. 주로 정신과 의사의 진료실이나 성당의 고해성사에서 이루어진 성에 대한 이야기들은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통제되었고, 힘없는 사람들은 자연히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었던 것 뿐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성적 담론에 대한 통제는 성행위나 성적 충동을 병리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푸코는 동성애자였는데 이러한 그의 성적 정체성이 그의 이론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문학 속의 동성애를 피상적으로 살펴본 사람들은 20세기에 들어서서도 문학 속에 공개적인 동성애는 거의 없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문학 속에는 동성애적인 주제와 이야기들이 넘쳐났지만 그것들은 거의 대부분 은유되거나 간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19세기 영국의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fred Tennyson, 1809~1892)의 ‘인 메모리엄 A. H. H.’(In Memorium, A. H. H.)라는 시에 드러난다. 이 시는 1850년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아서 할람(Authur Hallam)이 죽은 뒤 그를 애도해서 쓴 애가(哀歌)였다. 이 시에는 이성애(異性愛)에 관한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등장하기도 한다. “사랑하고 그것을 잃는 것이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테니슨의 사랑과 상실의 대상이 또 다른 남성이라는 사실은 스캔들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왜냐면 그러한 관계의 표현이 간접적이기 때문이었다. 동성 간의 친밀하고 강렬한 우정을 묘사하는 것은 문학의 역사에서 동성애가 표현되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영국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시인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cer, 1553~1599), 미국의 여성 소설가 사라 오네 쥬엣( Sarah Orne Jewett, 1849~1909), 영국의 여성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 등은 동성 간의 헌신적 우정을 묘사해 성적 대상으로서의 관계를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또한 문학 평론가들은 오랜동안 문학 작품들 속에서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남성 간의 유대’를 나타내는 동성애적 함의를 발견해 왔다. 미국 비평가 레슬리 피들러(Leslie Fiedler)는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Adventure of Huckleberry Finn) 속의 ‘헉’(Huck)과 짐(Jim), 허만 멜빌(Herman Melville)의 ‘모비 딕’(Moby Dick)에서 소설의 화자인 ‘이스마일’(Ishmael)과 족장의 아들인 퀴퀘그(Queequeg), 아일랜드 소설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의 ‘드라큘라’(Dracula) 속의 뱀파이어 사냥꾼들, 미국 소설가 존 놀즈(John Knowles)의 ‘분리된 평화’(A Separate Peace) 속의 피니(Finny)와 진(Gene) 등에서 동성 간의 미묘한 감정이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렇듯 문학 작품 속에서 공개적인 동성애적 관계는 20세기 후반까지는 거의 묘사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동성애 작가들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감추려 했던 태도들은 모든 예술의 장르에서 이성애적이 아닌 성적 경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데 제약으로 작용하였다. 레즈비언 작가였던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래드클리프 홀(Radclyffe Hall, 1880~1943)이 1928년 레즈비언 소설 ‘외로움의 벽’(The Wall of Loneliness)을 출간했을 때 그녀는 외설 혐의로 법정에 서야 했었다. 이 이전에도 동성애 문학은---18세기 영국의 희곡들--- 경멸의 대상이 되거나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했다. 이는 20세기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Cat on a Hot Tin Roof)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동성애에 대한 새로운 문학적 태도는 20세기 말이나 되어서야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흑인 작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 1953)의 자전적 소설 ‘가서 산에 그것을 말하라’(Go Tell it on the Mountain)이나 영국의 여성 작가 지넷 윈터슨(Jeannette Winterson)의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Oranges Are Not the Only Fruit, 1985)는 동성애가 등장인물의 정체성의 중요한 단면을 이루는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들이었다.
성과 성적 욕구가 인간 존재에 중요한 측면이었지만 문학 속의 성은 지극히 간접적이거나 모호하게 그려져 왔고 독자들은 행간의 숨은 뜻을 유추하거나 간접적인 사실들이나 은유들로부터 어떤 의미를 찾아내어야 했다. 하지만 섹스는 종족의 번식뿐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육체적 건강이나 정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특히 동성애는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 존재함으로써 성적 정체성이라는 현대의 주제에 커다란 역사적 담론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학은 성과 성적 욕구라는 주제를 결코 외면할 수 없을 것이며 좀 더 솔직하고 본능에 충실한 삶의 일면으로 다루어 갈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