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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Dec 18. 2023

'곧'과 '오 분'의 차이


하인리히 뵐(Heinrich Theodor Böll, 1917~1985)의 소설 ‘열차는 정확했다’(Der Zug war pünktlich)로부터 느낀 시간의 개념


“ ‘곧’하고 그는 생각했다. 기차의 딸가닥 거리는 소리, 모든 것이 예전과 같다. 냄새. 무조건 담배만 피우고 싶다. 단 자지 말 것! 창가로 도시의 어두운 윤곽이 스쳐 간다. 멀리 어두운 하늘에는 서치라이트가 무엇을 찾는 듯하다. 그 빛은 마치 밤의 푸른 외투를 입은 시체의 긴 손가락 같다. 또 멀리에는 은은하게 고사포 소리가 들린다. 그리곤 불빛이 없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어두운 집들이 있다. 이 ’곧‘은 언제가 될 것인가? 피가 가슴으로부터 흘러나와 가슴으로 되돌아가고 돌고 돈다..... 그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장을 만들자마자 ’나는 곧 죽을 것이다 ‘라는 말이 불쑥 머리에 떠올랐다.”


독일 소설가 하인리히 뵐의 소설 ‘열차는 정확했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스물세 살의 젊은 병사 안드레아스의 환상과 경험을 통해 전쟁에 직면한 인간의 비루함과 공포의 감정을 비극적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누구도 그 거대한 전쟁의 급류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망감, 절박감 그리고 분노의 감정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의 마음으로 이전된다.


소설 속에서 휴가를 마치고 전장(戰場)으로 돌아가는 젊은 병사는 기차 안에서 강력한 죽음에의 예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곧’이라는 시간의 개념과 결합된다. 죽음이 일상으로 벌어지는 전쟁터에서 나의 죽음은 언제 벌어질 것인가? ‘곧’? 병사는 살아있는 모든 것의 절대적 모순, 즉 ‘죽어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일반적인 진리를 넘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현실 속 죽음의 순간을 온몸으로 체감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곧’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늙은이들은 곧 세상을 뜰 것이고, 젊은이들은 곧 늙어갈 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곧 병들 것이고, 병든 사람은 곧 나을 것을 기대한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 개념의 부사 ‘곧’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그 ‘곧’이라는 시간은 과연 얼마만큼의 길이와 폭을 지니는 것일까? 소설 속 병사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곧, 곧, 곧, 곧은 언제일까? 얼마나 소름이 끼치는 말인가? 곧, ‘곧’은 1초 이내일 수도 있고, 1년 이내일 수도 있다. ‘곧’은 소름 끼치는 단어다. ‘곧’은 미래를 압축해 작게도 한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확실한 것은 전혀 없다. 절대적인 불확실만이 있을 뿐이다. ‘곧’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많은 것일 수도 있다. ‘곧’은 모든 것이다, ‘곧’은 죽음이다.”


‘곧’은 시간을 제법 확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긴 인생에서 일이십 년은 ‘곧’ 일 수도 있을 터이니까. 그러니 ‘곧’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단기(短期)적인 불안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불특정의 그것은 불안을 초래하지만 사람은 어떤 감정에도 ‘곧’ 익숙해지니 불안 또한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곧’은 여전히 짧은 시간의 함의(含意)를 벗어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곧’ 닥치리라는 경고는 강력한 위협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짧은 ‘곧’ 속에서 우리는 위안을 발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많은 이들이여 너무 상심하지 말라. 지옥 같은 삶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이여 기대하라. 곧,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으리니.


‘곧’에 대한 하인리히 뵐의 표현을 생각하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5분’이 생각났다. 그의 실제 경험이기도 했던 죽음의 오 분 전. 그는 반역 혐의로 총살형을 받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집행의 순간 황제의 사면령이 도착한다. 그렇게 그는 죽음을 모면한다. 이 체험은 20년이 지난 1868년 소설 ‘백치’를 통해 재현된다. 소설의 주인공 므이쉬킨 공작은 리옹에서 목격한 사형 장면과 함께 사형 언도를 받았던 사람의 마지막 몇 분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사나이는 다른 이들과 함께 교수대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사형 판결문이 낭독되었습죠. 그는 정치범으로 총살을 당할 운명이었습니다..... 살아 있을 시간은 5분도 남지 않았을 것 같더랍니다. 훗날 그는 그 5분이 끝없는 시간의 확장, 거대한 재산처럼 느껴졌답니다. 그는 이 5분 동안에 최후의 순간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을 만큼 충실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동안에 할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했다는 겁니다. 우선 동료들과의 작별에 2분의 시간을 쓰고 이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의 일을 생각하는 데 2분, 그리고 나머지 1분은 마지막으로 주위의 광경을 둘러보는 데 썼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이런 생각이었답니다. '만일 내가 죽지 않는다면 어떨까, 만일 생명을 되찾게 된다면 어떨까, 그것은 얼마나 무한한 것이 될까, 그리고 그 무한한 시간이 완전히 내 것이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나는 1분의 1초를 100년으로 연장시켜 어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1분의 1초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한 순간도 헛되어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했다는 겁니다.”


‘곧’과 ‘오 분.’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확정과 불확정의 차이이다. ‘오 분’이라는 정해진 시간은 더 이상 다른 기대나 희망을 불허한다. 오로지 그 정해진 시간의 흐름만이 남을 뿐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사용자의 상상에 의해 무한히 확장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면 ‘곧’이라는 막연한 개념은 제법 긴 시간으로 연장시킬 수 있더라도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상상의 폭을 좁히고야 만다.


그러므로 ‘곧’이라는 시간을 막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그에 일정한 시간을 부여하는 것은 어떨지. 가령 “십 년 후에 내가 돈을 벌지 못한다면?” ‘곧’이 아니라 ‘십 년’이란 시간을 대입하는 것이다. ‘일 년’이나 ‘오 년’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뚜렷하게 주어진 시간에 대한 깨달음이 나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하여 그 시간의 흐름을 유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곧’과 ‘오 분’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을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한 방법일지 모른다.


* 필자의 유튜브 '호모스크립투스'에서도 다양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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