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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Feb 01. 2024

나는 얼마큼 작으냐

김수영과 나

어느 날 고궁을 나온 시인 김수영은 근처 설렁탕집에서 비계덩이 가득한 국에 분노한다. 돼지 같은 여주인에게 욕을 던지던 그는, 순간 자신의 모습을 본다. 큰 것에는 비열하게 몸을 숨기고 작은 것들에 짐짓 분노와 경멸을 보내는 늙어 추해진 몸뚱이를. 비겁하고 하찮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형편없이 움츠러든 육체와 정신에 새삼 절망한다.


오늘을 사는 제법 나이 든 이들은 김수영의 고백에 공감한다. 그렇듯 소심해진 자신의 모습을 다시 그려본다. 시인의 투덜거림에 온몸이 저려온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평생을 노심초사하여 살았건만 어찌 개소리에 놀라고 젊은 놈의 목소리에 기가 죽는가 말이다. 이젠 조심하고 또 조심하다 떨어지는 나뭇잎에도 놀라 피한다. 그리고 가는 곳 모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새삼 감상에 젖는가. 미국 시인 프로스트는 작은 말에 올라 눈 덮인 숲 가를 지난다. 가다가 멈춰서 회한에 잠기지만 그는 여전히 가야 한다. ‘...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 마치 무슨 약속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렇듯 작아진 마음과 몸을 싣고 가야 할 길을 떠나는 것이 우리련만 여전히 후회와 아쉬움은 남는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 한 번도 무언가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도전한 적이 있었던가. 세월을 탓하고, 세태를 탓하고, 권세 있는 도적놈들만을 탓하다가 온몸이 꼬여 제 앞조차 똑바로 보지 못한 천박한 나는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알고 있었다. 비켜서있는 것이 비겁한 것임을. 눈 감고, 귀 막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헛소리를 내뱉을 입을 두 손으로 막으면서 나는 그렇게 비켜서 있었다. 두려워했다. 비겁했다. 그리고 애꿎은 모든 것에 들리지 않을 만큼만 소리쳤다.


오늘도 정해지지 않은 일과 속에서 컴퓨터를 켠다. 하얀 종이가 하얀 스크린으로 변하고, 연필 대신 자판의 글자들을 찍어 누르며 시간을 죽인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길게 살다 보면 알게 된다. 어차피 누구나 이리되리란 걸. 제 무리 큰일처럼 보여도 별것이 아니란 걸. 젊은 내가 했던 수많은 짓들이 그저 지금을 맞이하기 위한 발버둥이었음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빚어내는 것임을. 내 어찌 점 같이 유한한 생명 속에서 이리 지난 것을 그리워하리, 연연하리. 다만 세월만이 알게 될 그 진리를 다시금 떠올리며 김수영의 고백을 허한 웃음 속에 읊조려 본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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