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보다 더 허구 같은 현실
목표만 있고 목적이 없는 사회
허구보다 더 허구 같은 현실.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아직도 계속되는가? 세상사를 보다 보면 그 말이 요즘보다 더 실감 나는 때가 있었나 싶다. 허구는 인간의 상상 속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짐짓 꾸며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 속에서, 영화 속에서 마치 현실 같은 허구의 세계를 경험한다. 그리고 간혹 그것을 현실로 착각하기도 한다. 마치 꿈속에서 겪은 일이 생시처럼 느껴지는 일종의 환각에 빠지는 것이다. 허구는 현실보다 아름다울 수도 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허구는 가능성일 뿐 지금 맞닥치고 있는 현실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벌어지는 생생한 현실이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순간이 있다. 마치 허구인 것 같고, 거짓처럼 느껴지는 현실, 허구보다 더 허구 같은 현실을 목도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역대 대통령들은 허구 같은 현실의 초상(肖像)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패한 사람들을 곁에 두어 몰락하고 외로운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8년의 군사독재를 측근이 쏜 총탄으로 마감하고 말았다. 민주화의 기수로 불리던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말 자신의 아들을 감옥에 보냈고,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세 아들 모두의 실형 선고를 목격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비극적인 죽음을 선택했고 전두환과 노태우 대통령은 내란죄라는 엄청난 혐의로 투옥됐다. 세일즈맨의 신화 이명박 대통령은 부패 혐의로 감옥살이를 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비선을 두었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수감되었다. 적폐 청산을 부르짖던 문재인 대통령은 가족과 관련된 의혹으로 수사를 받고 있고 현직인 윤석열 대통령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보다 더 허구 같은 현실이 또 있을까? 도대체 이 세상에 전직 대통령들이나 그들의 가족들이 모조리 범법자로 처벌되거나 수사를 받는 나라가 어디에 또 있을까?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 암담한 현실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어찌 이 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은 이토록 척박한 삶을 대면하게 된 것일까? 참으로 개탄스러운 현실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들은 호사가들의 입방아로 더욱 허구적이 된다. 날이 새면 수많은 매체를 통해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모든 추악한 뒷얘기들이 반복된다. 이젠 지겹기까지 한 이야기들로 국민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파의 주장에 세뇌된다. 그리고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진실일 수도 있겠지만 과장이나 왜곡이 끼어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허구 같은 현실 속에서 국민들은 방황한다. 공허와 절망, 경멸과 혐오의 감정을 배운다.
어떻게 우리는 이토록 처참한 현실을 겪게 되었는가? 정치란 무릇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 그토록 외치는 사람들이 어찌 하나 같이 백성들의 고통에 이토록 무감하게 되었는가 말이다. 자신도 가족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 왜 정치가가 되고 선거에 나가고 권력자가 되어 신성한 역사를 더럽히는가?
정치권 싸움의 원인은 하나뿐이다. 권력을 잡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듯 정당은 권력을 추구한다.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권력을 잡기 위해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인 후의 문제이다. 목표(Objective)는 지향하는 실제의 대상이다. 정권을 잡는 것이 정치가의 목표이다. 하지만 목적(Goal)은 목표와는 다르다. 그것은 실현하고자 하는 일, 그것이 나아갈 방향을 가리킨다. 즉 목표가 향해야 할 궁극의 도착점이다. 우리의 비극은 권력이라는 목표가 달성되고 난 뒤 정치가들은 자신이 세운 목표의 목적을 상실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들을 잘 살게 한다는 정치의 본령, 그 목적을 모르는 자가 있겠는가? 하지만 목표를 이룬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 그들의 의무, 그들의 소명을 망각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행사하는 데에만 몰두한다. 그렇게 스스로 실패한 정치가의 길을 걷는다.
철장 안에서 보면 세상 밖이 감옥일지 모른다. 권력의 테두리 안에서는 모든 국민들이 정치인들의 권력을 위한 주구(走狗)들로 보이는 것은 아닐까? 국회에서는 민의를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이 논리도 품위도 없이 고함치고 삿대질을 일삼는다. 관리들은 보신에 급급해 배를 깔고 엎드려 움직이지 않는다. 심지어 법을 통해 진위(眞僞)와 시비(是非)를 가리는 사법부의 판사들도 시류에 따라 갈대처럼 흔들린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백성들은 믿을 구석이 없다. 목표만 있고 목적은 사라진 이 나라의 미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최소한 백성들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고 책임져야 할 권력자들만큼은 자신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할 것 아닌가. 허구보다 더 허구 같은 현실이다. 어둠 속의 작은 불빛처럼 한 줄기 진실을 붙들고 자신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지도자가 간절한 시점이다. 그들의 희생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